thought

신앙은 순전한 것이다. (스크랩:방언에 대한 성경적 정리)

hairyMES 2008. 12. 15. 02:43
마음이 답답하다.
글이 잘 정리되지는 않을 것 같다.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을때 그 사람의 환경이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람의 가는길을 막아야했던 나...

나를 많이 사랑하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
오늘도 그 사람은 내게 조언을 요청했고 나는 예전부터 그 사람을 대할때 어떠한 사건 때문에 마음이 안좋아서 언젠가는 그것에 대해 말할 타이밍만을 잡고 있었다.
문제가 있어 했던 그 사람에게 나는 좀 더 화이팅을 요구했고 그 사람은 만족해 했다..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난 더 나가야 했다.
어떻게 그 문제에 대해서 기도를 하는지 물어 봤고, 이야기는 진전되어 방언과 성령까지 얘기가 나오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였지만, 그 사람에 대한 얘기는 여기서 하지 않겠다.

다만 나의 신앙노선에 대해서 말하자면
난 방언의 은사를 무가치하게 생각하지 않고, 은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은사는 어느 하나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게 받아 뜻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다.
오늘 얘기의 이슈는 방언으로 시작했다.
과거 어떤분은 내게 "넌 방언을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난 방언을 받았는지 확신이 없었고,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 분은 "왜 성령께서 주신것을 니가 판단하느냐?" 하며 방언을 즉시 사용할 것을 권면했지만
나는 방언의 쓰임을 얘기하며 "때가 된다면 방언을 허락하실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아직 내게 방언이 없음을 얘기한 것이였다.

방언은 내가 원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 성령께서 우리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전 14:2; 요 16:13)
그리고 성령께서는 본인은 들어내지 않으시며 우리들안에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역활을 하신다. (요 16:14-15; 15:26; 고전12:3)
성령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부른다고 오시고 가라고 한다고 가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누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인정하고 믿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성령이 활동하신 결과이다(고전12:3)
때문에 성령운동을 한다며 성령을 불러오고 성령을 전달하는 행위와 방언을 말해야지만 성령을 받은 초급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생각하며, 성령운동을 광고하며 사람을 모으거나 자랑을 일삼는 행위를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기도는 내 뜻을 하나님께 알리고 뜻을 이루어 달라고 하는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주님과 교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오늘 나는 나의 소견을 얘기 했고 그 사람은 나와 성령에 대한 이해가 달랐고, 방언에 대한 이해도 달랐다.
대화중 그 사람이 2년전에 내게 어떠한 교회를 가보라고 했던 그 교회를 나는 유심히 보고 있었고, 2년동안 조사를 해 보았더니 불건전 이상의 교회라는 것을 알았고, 그 사실은 교단차원을 넘어서 이야기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얘기 했다. 그리고 요즘 유행하는 성령운동에 대한 얘기도 꺼냈더니 그 사람은 마음이 무겁다며 전화를 끊었다.
나의 마음 또한 찹찹했다.
그 사람의 마지막 말이 떠나질 않는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단순하게 말해서..
중심이 잡혀 있는 신앙인이라면 딱 보면 알 수 있는데...
왜 그런곳에 빠져 있는지...내가 되묻고 싶었지만..... 삶이 힘들어 찾은 곳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못된 길은 잘못된 길이다.

신앙은 순전한 것이다.
정말 정말 정말 수만번 되내어 강조하고 싶은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은 순전하다라는 것이다.
인간의 욕구를 위해서도 아니고,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도 아니고,
나를 내세우지 아니하고, 나를 위해서도 아닌, 이웃과 주님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한, 그 본질로 인한 여타 다른 현상들... 즉 병 고침과, 가족의 회심과, 빚 청산등과 같은 이 세상에서의 문제거리들의 해결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지(해결이 되든 안되든 그것은 상관이 없다) 그것이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는것이 순전한 신앙이다.
 
도대체 방언은 왜 할려고 하는 것인가?
솔직히 구했던 은사, 방언을 받으면 감사할 일이지만 난 더 부담스러울 것 같다. -.-;
얼마전부터 성경후원을 받고 있다. 전도하는데 성경이 부족해서 후원을 받는다고 글을 올렸더니 성경을 챙겨주시는 분들이 생겼는데 성경을 받을 때마다 무기는 업그레이드된 격이지만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 모른다.
은사는 자기를 꾸미거나 자랑을 위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 은사를 허락하셨다는 것은 그 쓰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함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맘대로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요구하면 들어주는 요술램프가 아니라는 말이다.
결코 성령은 내가 주고 싶다고 남에게 전달 할 수 있는게 아니다.
결코 방언은 내 기도를 멋내기 위해서 구사하는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철저하게 낮아지는 것이 순전한 신앙이다.
자신이 기도하고 있는 구원 받지 못한 그 사람이 구원을 받을수만 있다면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셔도 됨을 고백하는 것이 순전한 신앙이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 사람과의 관계를 위해서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아래는 방언에 대해 정리된 글이 있어서 참고로 스크랩해 왔다. 잘 정리되어 있으니 꼭 읽어 보길 권한다.

[출처: 네이버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방언에 대해서 자주 질문이 있으므로 한 회원분께서 정리를 하여달라는 부탁을 하였으므로, 성경적으로 정리를 하여 보았습니다.

이 글은 특별히 방언과 관계가 있는 빈야드, 은사남용주의 신사도운동 게시판에 올려 놓겠습니다.


(1) 정통교단이 방언의 은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장로교이든 감리교이든 침례교이든, 보수적인 신학을 가졌든 진보적인 신학을 가졌든.... 성경은 방언의 은사를 언급하고 있으며, 그래서 방언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성경적인 기록 그대로, 순서를 지키며... 질서있게.... 적당히 ...하자는 것입니다.


(고전 14:27-28)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고전 14:22-23)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고전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있게 하라


(2) 방언은 누구나 할 수 있으며 누구나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은사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각 지체마다 다른 은사를 주는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사란 헬라어 "카리스마"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말합니다.

은사란 일차적으로 두 가지의 개념을 갖는데, 하나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 즉 구원 자체를 말하며, 또 하나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위하여 쓰도록 주시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을 영적은사를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사가 영적은사만 말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카리스마)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롬6:23의 "은사"(카리스마)는 하나님의 값없는 영생의 선물을 말합니다.

또 은사(카리스마)의 다른 의미는 각 지체에게 주님의 몸을 세우도록 베푸신 것인데, 영적은사란 "유익을 위해 주시는 성령님의 나타남"(고전12:7)이며,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고전14:5. 14:26)


방언같은 눈에 보이는 은사만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며, 은사는 각 지체에게 주는 여러가지 형태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고전 12:4-6)

은사를 주는 성령은 한분이지만, 각 지체가 받는 은사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모든 교인이 다 동일한 은사를 받는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고전 12:4-12)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전 12:28-30)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어떤 분은 방언의 은사는 은사의 관문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은사가 있으며, 그 은사들이 순서를 말하지 않습니다. 각 지체마다 주시는 은사가 다릅니다.


(3) 방언은 외국어로 말하는 것만이 방언이라는 주장:

방언의 은사란 헬라어 "랄레인 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이며 그 의미는 "다른 방언으로(다른 언어로) 말하기"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여 처음 나타난 방언의 은사는 실제 사용되는 다른 지역의 언어를 말하는 형태였음이 분명합니다.(행2:4-11)

그러나 바울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고전13:1)이라고 하였고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말로 알아듣는 자가 없다"(고전14:2)이라고 하였으므로 외국어만 방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른 지역의 방언은 알아 들을 수가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에, 방언은 두가지의 형태로 추측되어지기도 하며, 어떤 학자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는 "말할 수 없는 탄식"(롬8:26)도 방언의 형태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한가지 음이나 몇가지 동일한 반복구절만을 발음하는 방언이 정말 방언이냐고 묻는데, 그것은 누구보다도 본인이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며, 모든 방언을 다 방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자기도 알아듣지는 방언의 기도는 "야만"이라고 말하며(고전14:12) 모두가 다 방언의 은사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졌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29-31)


방언은 오순절 이후 사도행전에서 세례를 받고 믿음을 가진 표적으로 기록되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성경에서 세례를 받고 믿음을 가진 경우에는 반드시 방언이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4) 연습에 의한 방언은 잘못된 것입니다.

은사란 성령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즉 어떤 연습이나 훈련에 의하여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연습과 훈련에 의하여 얻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나 행위로 취득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할렐루야를 하루에 천번씩 연습하면 혀가 풀려서 방언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주장이 있고, 방언을 하는 그룹과 방언을 못하는 그룹이 마주 보고 앉아 함께 연습을 하면 방언을 하게 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러한 방언은 성경적인 방언이 아닙니다.

                  

(5) 고린도전서 12-14장은 고린도교회의 은사의 남용에 대한 바울의 비난을 기록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4장은 그다지 어려운 구절이 아니며, 난해한 구절이 없습니다.

어느 누가 읽어도, 어느 성경주석을 참고한다고 할지라도, 그 구절의 내용은 고린도교회에서 행하여지던 방언의 은사에 대한 남용을 바울이 자제하도록 권면하는 내용이 분명합니다.

즉 성경대로 방언의 은사를 하려면 상당히 자제를 하여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고린도전서12-14장을 마음문을 모두 열고 제 3자의 입장에서 정독하여 보시면 바울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방언은 믿는 자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

또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마음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 못하므로 덕세움을 받지 못합니다.


고전 14: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고전 14:14-17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고전 14:6-12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고린도전서는 그당시 고린도교회에서 행하여지던 무질서적인 방언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그것을 자제하도록 권면과 충고를 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서신을 통하여 방언에 대해서 많은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방언이 남용되어지는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내용이 아니라고 비판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을 남용하여도 괜찮다든지, 성경을 달리 해석을 하여야 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기독교인의 행위가 아니라고 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진리를 자기의 기준에 맞춥니다.

내가 방언을 남용하고 있으면, 그것이 비성경적이라고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는 행동은 그것이 비성경적인 내용이 분명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를 하지 않으면 기도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생각하며, 내가 교회 출석을 잘 지키지 못한다면 교회 출석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내가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있다면 주일학교 교사는 젊은 영혼을 양육시키는 매우 중요한 직분이라고 주장하며, 내가 성가대를 하고 있지 않으면 성가대가 교회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즉 내가 직접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가치척도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승용차가 없을 때에는 교통신호를 안지키는 승용차를 욕하지만, 승용차를 갖게되면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들을 욕하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단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교회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며, 정통교회가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게 됩니다.

“나”라는 기준이 가치척도의 선입감으로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다른 성경사전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이것을 인용하는 이유는 방언의 남용에 대한 고린도전서 12-14장의 객관적인 성경해석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아가폐 성경사전 602-603쪽, “방언을 말함”)

고린도교회에서는 방언에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높은 가치를 두었으며, 방언의 은사가 성령의 임하심에 대한 특별한 증거라고 생각하였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도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서 방언으로 기도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밖의 불신자들에게 쓸데없이 비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교회 성도들이나 불신자들에게 덕이 되고 모본이 될 수 있도록 방언을 사용하라고 권면하였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방언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여겼으며, 모든 고린도교인들이 다 방언으로 말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는 헌신적인 생활이 더욱 귀중하며 방언을 할 때에는 반드시 통역과 함께 해야 된다고 가르쳤다. 여기에서 통역은 아마도 단순한 번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꿈이나 표적이나 예언적인 행위들을 해석하듯이 방언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같다. 또한 바울은 방언을 말할 때에 세 사람이 넘지 않는 범위에서 순서를 정해놓고 차례대로 하라고 가르쳤다. 방언은 성령의 부분적인 은사들 가운데 한가지이기 때문에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은사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하였다.


물론 기록된 성경의 내용은 시대적이고 전통적인 상황까지 불문하고 반드시 문자적으로 똑같이 지켜야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유대인들의 전통과 문화적인 제도까지 그대로 지키자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기록된 것을 “도둑질 하여도 좋다”고 해석을 하면 안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입니다.

시대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변화가 있을지라도, 도둑질을 하여도 좋다든지, 간음을 하여도 상관이 없다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비판하는 고린도교회에서 행해지던 방언에 대해서 성경적인 정리를 하여 보겠습니다. 필자가 말하려는 내용은 성경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요즈음 두사람이나 세사람이 순서를 지켜서 방언하는 교회가 있습니까?

또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였는데, 통역이 없으면 방언을 하지 말고 교회 안에서는 잠잠하여야만 성경대로 하는 것입니다.

과연 성경대로 지키지 않는 방언에 대해서,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1) 덕을 세우는 방언을 하라(14:3-5)

(2)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을 가르치지 않고 방언을 말하면 유익하지 않다.(14:6)

(3)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다.(14:7-9)

(4) 소리의 뜻을 알지못하면 야만이 된다(14:11)

(5) 방언의 기도는 마음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기도가 된다(14:14)

(6) 일만마디 방언보다 다섯마디 가르치는 것이 낫다(14:19)

(7) 방언은 믿지 않는자들의 표적이다(14:22)

(8) 온 교회가 방언을 하면 믿지 않는자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미쳤다고 할 수 있다.(14:23)

(9) 두사람이나 세사람이 순서를 지켜서 하라(14:27)

(10) 순서를 지켜서 하되, 한사람은 통역을 할 것이며, 통역을 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하며, 자기와 하나님께만 하라(14:28)

(11)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는 말라, 그러나 적당하고 질서대로 하여야 한다(14:40)

(12) 사랑이 없는 방언은 꽹가리일 뿐이다(13:1)

(13) 부분적이며 폐하여질 것이다.(13:8-10)

(14) 장성한 사람에게는 어린아이의 시절의 것이 된다(13:11)

(15)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12:31)

(16) 교회의 각 지체들에게 주는 수많은 은사 중에서 하나의 은사이다.(12:4-11)

(17) 모두 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아니다(12:30)

'thought'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8년도 메모 모음  (2) 2008.12.31
우리의 연약함에 대항하여  (1) 2008.12.15
인간의 욕심은 얼마나 채울 수 있는가?  (0) 2008.12.02
기도  (0) 2008.11.25
나는 어떤 사람일까?  (4) 2008.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