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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달콤한 꿈에 비유하다.

hairyMES 2010. 3. 25. 03:06

※본 글은 기독교적세계관을 갖고 작성한 글이므로 감정적인 종교논쟁은 가급적 피하고자 합니다. 




인생을 달콤한 꿈에 비유하다.





주기도문에 보면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영적전투에 대한 대목이 나온다.

칼빈주의의 하나님의 주권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난관에 부딧치게 되는것들이 있는데 그것 중 한가지는 바로 <>의 존재이다.





어거스틴은 “악은 선의 결핍”이라고 말했다.

, 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아니지만,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창조물인 선이 결핍되어 악성향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짚어야 할 부분이 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아주 선하신분이시고, 모르는 것이 전혀 없으신 분이시다.

그런데 그런분이 자신의 창조물이 타락할 것을 알고 계셨지 않으셨을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을 설명할때,

인간의 타락 때문이라고 우리는 설명하는데,

그 인간의 타락은 바로 <사단> 때문이라고 말하다.

그 사단은 천사가 <교만>으로 인해서 타락하여 <사단>이 된것인데,

그 사단이 교만해서 반기를 들었고, 그 죄 값으로 <세상의 왕>인 사단이 되는것도 하나님은 아셨을 것이 아닌가? 또는 그 사단이 교만 할 수 있었던 것을 애초에 <보호장치>해 놓으셨다면 이런 인류의 비극을 보호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





비 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에서 그들이 논지하고 있는 부분은 “너희들이 말하는 신은 너무 오류투성이다.” 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의 죽음, 또는 기형아, 날때 부터 앉은뱅이, 세상의 부조리 등의 이세상의 이야기들을 말하고 있다.

그들과 하나님을 논하다보면, 하나님은 공정하지 않고, 사랑이 무한하시지 않다.

, 인류는 하나님의 잔인성 안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된다.





관점을 바꿔보겠다.

얼마전 로마카톨릭의 교회관과 구원관에 대해서 살짝 배웠을때 제 2차 바티칸공회를 통해서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음을 선언했던 글을 보게 되었다. 그들이 말하는 구원은 우주적이며,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 강조하여 일반은총격인 타 종교로 하여금 인간의 죄성을 억제하는 차원을 넘어선 구원의 단계까지 포용하는 입장을 표명했다는 것이다.

난 이 주장에 동조하진 않지만 내게 아주 좋은 힌트를 줬다.

그것은 바로 현실의 너머, 즉 영원적 구원관을 현실에 부각하는 것이였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 대목은 창세기 1장부터 시작된다. 보편적으로 현실의 시간인 6일동안 창조되었던 것으로 본다. 그것은 6일이 맞는지 아닌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하나님은 영원에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의 영원은 현실의 6일이든 6시간이든 6초든 변함이 없다. 그 창조하시는 부분에 이 물질계만 창조하신것이 아니라, 성경에는 <>을 다루는 부분도 창조하셨음을 성경 전체에 내포하고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꿈(dream)을 주셨다. 그리고 현실을 주셨다. 그리고 내세를 주셨다.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을 증거로 해서 말이다.

우리가 지금 현실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내세의 영원의 관점에서 본다면 현실은 정말 꿈과 같은 것 일것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꿈에서 깼을때 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좀 더 폭 넓게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창조와 피조물인 우리에게 복(구원)을 주시는 스케일이 영원의 단계까지 끌어 올려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집중하는 현실은 사실상 현실일 뿐이다. 우리가 꿈은 꿈일뿐이라고 치부하는 것과 같이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현실은 잠시 꿈꾼것과 같다. 바꿔말하면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꿈속에서 얼마나 말도 안되는 상황들이 벌어지는가? 웃지못한 상황들을 현실에 깨어서 얼마나 현실에 적용하며 살아가는가? 억울한 일이 있다면 현실에서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사실 피식 웃고 말일이다.

현실의 억울함, 풀리지 않는 숙제 등 그것은 영원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우리가 영원에 들어갔을때,

현실의 고통은 현실에 두고 올 것이다.

주님의 심판대위에 섰을때,

주님으로 인해 받은 고난은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될 것이다.

현실은 현실이였을 뿐이며,

우린 영원에 들어와서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으로 부터 나누게 될 것이다.

물론, 현세에 어떻게 살았느냐가 우리의 영원의 방향에 영향을 줄테지만,

어떻게 살았든간에 억울할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죄를 지었다면 죄의 댓가를,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면 면류관을 영원이 누리게 되는것일 뿐.






정리하자면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은 왜 이런 세상을 창조하고 허락하셨는가?”에 대해서 너무 고단해 하며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범위를 너무 인간의 관점으로 좁히지 말자. 악을 왜 허락하셨는가? 이런거 사실, 영원에 비하면 비 본질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악이 창궐하든 아니든간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칭함만 받으면 우리의 종착역인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영원히..

꿈에서 깨면 우린 현실에 와 있다. 현실에서 깨면 우린 영원에 가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이다.

여기까지만 읽고 오해하지 않길 바라며 덧붙인다.

우린 꿈에서 이게 꿈인지 뭔지 알수도 있고, 모를수도 있지만 꿈에서 최선을 다해서 행동한다. 또는 산다. 그것이 일장춘몽<一場春夢 >일지라도.

그것은 현실도 똑같다. 우린 현실에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 바르고 성실하게 그리고 누릴것을 누리고 베풀면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현실은 꿈보다 훨씬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 중요도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역을 하실 정도로 매우 중요한 곳이며, 어떻게 살았냐에 따라서 영원의 방향도 정해질 정도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인양 열심히 사는 것은 옳치 않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본다.



마치며
하나님은 그리 만만하신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알게되었으면 좋겠다.

고작 현실을 보고 하나님을 뛰엄뛰엄 보는 오류를 범하지 말자.
 



“하나님의 센스에 감격하다.”







ps.

어느날 꿈을 꾸는데 너무나 가슴아픈 사건이 벌어졌다.

믿겨지지가 않았지만 엄연히 실제로 벌어진 상황이였다.

난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것이 혹시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꿈이라고 믿고 싶어했지만 엄연한 현실이였다.

그래도 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이것은 꿈이라고 되뇌이며 꿈에서 빠져 나오려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곤 난 잠에서 깨어났다. 정말 꿈에서 깬 것이다.

그 사건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꿈속에서의 이야기였다.

그것은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주진 않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은 현실을 넘어 영원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ps. 2

꿈은 color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