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stian story

현대 이스라엘 3차 중동전쟁

hairyMES 2009. 2. 9. 14:47

요즘 가자지구 사태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가운데....

이스라엘 역사를 보다가 매우 재미있고 우리에게도 유익할 만한 3차 중동전쟁 일화를 옮겨 봅니다.

앞부분의 과거 역사는 참고로 봐주세요..

메인은 중간 부터 나오는 3차 중동전쟁 입니다. 솔직히 좀 감동 먹었음..

 (출처: 어떤문서....ㅎㅎ 잘 모름....)

 


. 이스라엘 고대에서 현재까지 역사와 성경역사

이스라엘(예루살렘) 역사 [이스라엘 여행기]
예루살렘에는 10만 년전 사람이 거주하였으며, BC30 세기말경 여부스(에부스)족의 가나안인이 도시를
만든 것이 유래이다.
도시의 이름은 처음에 평화 도시의 뜻으로 '우루살림' 또는 신성한 도시의 뜻인 '쿠드스'라고 불렀다.
BC20-10
세기경까지는 이집트의 바로(파라오)의 지배아래 있었다.
BC10
세기경 여부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거할 때에 다윗이 빼앗아 다윗 성이라 하였고,
이 때부터 예루살렘은 유대인이 주인이 되어 수도삼고 새 종교중심지로 만들었다.
BC580
경에 예레미야가 유대인을 데리고 알렉산드리아로 피난 갔다.
이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72명이 하였다.
BC536,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도시를 재건축하였다.
BC332,
팔레스틴을 점령한 알렉산더는 유대인을 특별히 고려하여 예루살렘에 남겨두었고,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도록 특전을 베풀었다.
BC305,
알렉산더의 부하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에서 왕조를 열고 BC181년까지 유대를 지배하였다.
BC198,
셀레우코스왕조의 지배에 들어갔다.
BC166,
마카비가 셀레우코스왕조의 안티오코스4세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마지막인 하스몬왕조를 열었다.
BC63,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하스몬 왕조를 점령하여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파괴하였다.
BC37,
헤롯(헤로데스)왕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성전을 재건하였고, 번영을 되찾았으나,
문명은 헬라로 변했다.
AD30, 4
월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10년간 골고다 언덕까지 성벽을 쌓았다.
AD70-71
티투스(티토)가 도시를 점령하여 모든 것을 파괴하였고, 내가 이런 성을 파괴했다는 증거로
서쪽 축벽만 남겨놓았다. 헤롯의 번영은 사라졌으며, 이 때부터 '평화의 땅' '통곡의 벽'이 되었다.
이제 '평화의 땅'이 제 이름을 빨리 찾기를 바란다.
AD 73,
로마의 정복이 눈앞에 다가오자 항복보다는 죽음을 택하였다.
그들은 난공불락이라는 '마사다' 요새에서 960명 중에 어른 2명과 어린이 5명을 제하고 모두 자살하였다.
지금도 이스라엘 군인들은 이곳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자는 맹세를 한다고 한다.
AD132
년 전설적 인물 시므온 바르코시바는 민24:17절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이라 예언에 따라
'
바르 코크바(별의 아들)'로 개명하였으며,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AD135
년 명장 율리우스 세베루스가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하드리안 황제는 다시는 반란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이스라엘에 대하여 몇 가지를 단행하였다.
1.
예루살렘을 로마식 도시로 재건하여 로마 직속지로 다스리며 유대인 출입을 금하였다.
2.
예루살렘의 이름을 '아이리아 카피톨라나'로 개명하였다.
3.
유대지역의 이름을 '팔레스타인'으로 바꾸었는데, 이 지명은 오늘날까지 사용하게 되었다.
AD 135
년 마지막 반란 이후 팔레스타인의 유대 민족은 극소수 집단으로 위축되어 이스라엘은 더이상
하나의 국가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이 후로는 1800년 동안 독립하려는 시도는 일어나지 않았다.
AD313,
콘스탄티누스1(재위 AD306-337)의 모친 헬레나 황후의 간청으로 예루살렘에 그리스도의
성묘교회가 최초로 건립되었다.


AD313년 로마는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되었으며, 예루살렘은 순례자로 붐비었다.
AD638,
예루살렘은 회교의 함락되었으며, 예루살렘은 마호메트가 천사 가브리엘의 인도로 알라신에게
가기 위해 승천한 곳이라고 하여 메카, 메디나와 함께 3대 성지가 되었다.
AD 691
년 예루살렘의 바위(파괴된 솔로몬 궁전 위)에 회교의 돔사원을 건립하였으며,
돔사원 안에는 마호메트가 승천할때 바위도 따라 올라가자 천사가 눌러서 못 올라 갔다고 하며,
그때의 천사의 손자국이 바위에 나 있다.
그때 마호메트의 머리카락도 빠졌는데 그것을 모아둔 상자가 있다.
이 후부터 유대인의 저항이 계속 되었고, 유대인을 이 땅에서 살 수 없게 하는 정책으로 유대인이 돈에
대한 집착을 이용하여 나무마다 세금을 매겼다고 한다.
세금을 내기 싫어 모든 나무를 베어 버려 땅은 황폐하여 졌고, 유대인들은 스스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던 곳이 황폐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스라엘 여행 중에 이스라엘 운전기사가 나무가 없는 이유로 앞의 이야기를 하였다.
통역한 현지가이드는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이스라엘 운전기사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이 사실인 것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AD1096-1270
년까지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하여 전쟁을 하였다.
그러나 잠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셀죽투르크의 다메섹(다마스쿠스) 총독의 관할지였다.
성벽 대부분은 오스만 투르크의 슐레이만 대제(재위 AD1529-1566)의 시대에 축조 된 것이다.
1798-99
년 일시적으로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았다.
AD1916
년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 편에 참가한 투르크군이 패하였고, 영국의 앨런비 장군의 점령으로
AD1920
부터 영국이 위임통치하였다.
AD1917
년 군비가 부족한 영국은 유대인의 돈을 얻으려고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약속의
'
밸푸어(외무부장관)선언'이 발표되었다.
밸푸어의 선언이 이루어 질 것을 믿고 유대인의 이민이 증가하였다.
이 시대의 배경으로 만든 영화가 '엑스더스(Exodus)'이다.
AD 1930-40
년대초 아돌프 히틀러의 박해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늘어나면서 유대인과 아랍인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AD 1948
5 14 2차 국제연합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의 쌍방에 분할하는 결의하였다.
영국군의 철수와 동시에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AD 1948
5 161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에게 승리하였다. [나세르 참조]
AD 1956
10 29일 수에즈운하 국유화로 2로 이스라엘군이 시나이 반도를 침입하였다가 철수하였다.
AD 1967
년 나세르의 아카바 만을 봉쇄로
*3차 중동전쟁이 일어나 승리하였다.
AD 1973
년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점령지는 계속 불안정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AD 1979
년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으나 팔레스타인과 점령지인 유대인 정착촌 문제로
여러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가 어려워졌다.
AD 1982
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에 속한 게릴라군을 몰아내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하였다.
AD 1987
년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이 '인티파다(intifadeh-반란의 뜻)'를 일으키기
시작하여 이스라엘 당국은 1992년 이후 아랍의 여러 국가와 팔레스타인 대표들과 직접 평화 교섭에
나서 PLO 5년 동안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의 자치를 점차 확대한다는데 동의하였다.
AD 1994
년 이스라엘은 요르단과 평화협상을 맺었다.



*3차 중동전쟁(1967 65-10)
3
차은 '6일 전쟁'이라고도 하는데 이 전쟁은 세계전쟁사에 길이 남을 승리이며,
우리도 본 받을 점이 많아 조금 자세히 기록하려고 한다.
원인은 나세르가 2차 전쟁에서 패한 후 사회복지에 써야할 재정을 군사대국 정책에 사용한
부작용으로 이집트의 경제 사정은 형편없는 지경의 위기에 처하였다.
이렇게 국민들의 불만이 쌓여갈 때 이를 무마시키기 위하여 소련의 전폭적인 협조아래 이집트군의
재무장을 서둘었고 국민들에게 유태인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겼다.
이에 이스라엘은 건국 20년이 지나 초창기와 같은 단결된 감투정신이 점차 쇠퇴하였고,
절박함을 깨닫지 못하는 젊은이들과 이민, 실업, 계층갈등 등의 사회문제를 해결하여 국민을
단결시키는데는 전쟁의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이에 소련의 위협을 느낀 미국은 이스라엘을 돕기로 결정하여 소련과 미국 사이에 대리전쟁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개전당시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전력 비교는 전차 2.6:1 병력 1.8:1 전투기 1.5:1로 이스라엘은
이것만으로도 명백한 열세에 또 당장 싸워야 할 요르단과 시리아의 전력은 포함하지도 않았다.
그들을 도울 이라크와 회교국의 군대 또한 빠졌다.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나세르의 말대로 '이스라엘을 간단히 홍해로 쳐 넣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6
5일 새벽 이스라엘 공군기들을 거미줄 같은 레이더망을 피하여 수십 개로 분산된 비행장을 완벽한
기습으로 이집트의 공군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시리아와 요르단의 공군도 같은 운명을 만났다. 60:1이라는 우위의 아랍연방군 공군의 위협은 이것으로 사라졌다.
여기에는 모사드가 수집한 조종사들의 가족사항에서 레이더 요원들의 근무 습관까지 포함하였다.
또 이스라엘은 비행장과 사관학교 등에 '니플러스'라는 나무를 제공하고 나무의 관리비용까지
대 주었는데 이것은 이날을 대비하여 준비한 것으로 조종사들이 나무를 표적으로 삼아 정확한 포격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다.
그들의 준비는 이렇게 철저하였으니 승리는 우연이 아니다.
1995
년 카이로 갔을 때에 4차 전쟁에 파괴된 것을 복구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였고, 이집트의 전차를 900대 정도 파괴하였고,
상처하나 없는 900대 정도는 훗날 이스라엘이 T54/55전차를 개조하여 Ti 67이라고 개명하였다.
이스라엘은 Ti 67 전차로 독립전차여단을 만들었다.
그래도 남는 것은 다른 나라로 수출까지 하여 실속을 챙겼으며,
이 때에 노획한 무기가 25억 달러 상당에 해당한다. 이집트는 80%의 전력을 상실하였다.
요르단으로부터는 요르단강 서안의 웨스트 뱅크를 점령한 후 수도 암만 40km까지 진격하였다.
가장 큰 수확과 감격은 2000년 만에 처음으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 것이다.
그리고 시리아로부터는 수시로 이스라엘에 대포를 퍼붓어 위협을 가하는 전략의 요충지인 골란고원을
장악하여 그들의 생명수인 갈리리의 물 걱정까지 해결하였다.
다마스코스가 보이는 곳까지 점령하였으나 현재는 유엔군이 주둔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본토보다 7배나 되는 땅을 정복하였다.

[3차 전쟁 때에 재미있었던 일화들]
여리고를 공격 할 때에 라밀라에서 어느 병사가 상점에서 노획한 나팔을 꺼내어 요란스레 불었는데
이 나팔 소리를 들은 요르단 병사의 사격이 갑자기 뚝 그쳐버렸고, 잠시 후에는 여리고시 중앙 광장에
백기가 올라갔다.


구약성서에 '여호수아'의 나팔 사건이 현재에 재현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집트는 있지도 않는 공군이 빛나는 전과를 올리고 시나이전쟁에서 연일 승전하고 있다고
방송하는 바람에 통신 두절된 이집트군이 방송만 듣고 낭패를 당하였고, 그것은 믿은 요르단은 전쟁에
뛰어 들어 GNP 1/2를 생산하는 웨스트 뱅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집트와는 반대로 시리아의 방송은 점령되지도 않은 곳을 미리 점령되었다고 믿지 못 할 사건도
생겼는데 어쩌거나 그 덕에 겁먹고 도망간 시리아군은 많은 목숨을 구하기도 하는 해프닝을 연출하였다.
이 전쟁의 해프닝이 많았는데 너무 빨리 진격하여 연료를 보급 받지 못한 이스라엘 탱크 9대는 두 대의
연료를 한 탱크로 모으고 연료가 없는 탱크를 끌고 전진하는 일이 생겼다.
밤중에 뒤에서 후퇴하는 이집트의 대규모의 탱크와 휩쓸리게 되었으나 그들은 적군이 여기까지
진격하리라 생가지 못하고 끌고 가는 탱크가 진격군의 모습이라고는 생각지 못하여 눈치채지 못하였다.
이스라엘 탱크도 태연하게 따라 가다가 불을 키고 도망하던 이집트군이 이스라엘 공군기에 공격을
받았을 때에 이스라엘 탱크는 이집트 대열에서 탈출하여 이집트 탱크 부대를 부스는데 합세하였다.
샤론(후에 수상됨) 탱크 사단는 이집트의 대규모 탱크와 만나게 되었다.
서로 대치 중에 야간 투시장비도 없는데다가 수색대가 지뢰밭이라는 보고도 받아 날이 밝으면 지뢰를
제거하여 공격하기로 하였다. 긴장 속에 날이 밝자 귀가 막힐 일이 벌어졌다.
겁먹은 이집트군은 대치상태에서 장비를 그대로 놔두었고, 어떤 것은 시동이 걸려있는 상태이었다.
그들은 지휘관과 졸병까지 사이좋게 밤사이에 모두 도망하고 없었다.
샤론 부대는 1개 여단의 이집트 탱크부대를 계곡에서 만났다.
먼저 앞에 것을 부수어 길을 막고 맨 뒤의 것을 부수어 퇴로를 막아 일렬로 세워놓고 파괴하였는데
천명의 병사와 탱크가 타는 냄새가 계곡을 가득 메웠다.
후에 샤론은 승리의 기쁨보다는 연민의 정을 느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샤름앗샤이흐 작전도 마찬가지로 2차 전쟁에 힘들게 정복한 것을 거울삼아 육해공으로 친밀하게 계획을
짜고 해군이 먼저 이곳에 도착하니 기지가 텅텅 비워져 있어 공수부대는 내려보지도 못하고 되돌아갔다.
이렇게 된 이집트의 사연은 2차 전쟁에 끝까지 항거하였으나 결국 항복하면서 많은 희생자만 낸 것을
거울삼아 결국은 정복 당 할 것으로 인명 피해를 주리려고 현명한(?) 선택을 하여 비웠다고 한다.
진풍경은 요르단에서도 일어났다.
요르단에 진격한 이스라엘 군대를 열렬히 환영하는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 군대도 얼떨결에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스라엘 군이 무장한 민간인을 무장 해제하려고 총을 빼앗아 공포탄을 한발 쏘자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다.
이 짧은 해프닝은 너무 빨리 진격하여온 이스라엘 군대를 자신들을 도우려 온 이라크의 군대로 착각하여
생긴 일이었다.
또 전쟁의 전과는 피해는 줄이고 전과는 부풀린다라는 전쟁의 일반적인 상식인데 요르단측이 밝힌
사망자는 15,000여명(모사드는 1,500명 추정), 시리아는 25,000(140명이라고 함) 발표하였다.
이 같은 행동은 아랍의 형제들에게 동정을 바라고 발표한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승리 원인)
1.
정신의 차이다.
예를 들면 전쟁이 나자 미국에서 유학하는 이스라엘학생과 이집트학생이 모두 결석하였다.
이스라엘학생은 전쟁에 참가하기 위하여 결석하였고,
이집트학생은 징집 당하는 것이 두려워 숨기 위하여 결석하였다고 한다.
2.
뛰어난 전술이다.
철저한 준비와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공세적 방어의 개념으로 자국의 파괴를 줄이기 위하여 신속히
자국의 영토로부터 가능한 멀리 떨어져 싸운다는 전략과 적은 병력으로 싸워야 하는 불리함 때문에
기습을 통하여 빨리 끝내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우군을 돕는 전략을 세웠다.
예로 시나이를 4일 만에 정복한 후 그 군대를 빼내어 시리아 전에 투입하였다.


3. 훈련부족과 군인의 자질이다.
이집트 군은 농촌 출신이자 무식하였으며, 없는 사람의 자식이 있는 자들을 위하여 열심히 싸우기를
바라는 것도 무리이었다.
그리고 학벌에 따라 군 생활 기간이 다른데, 대졸은 1, 중졸은 2, 무학은 3년으로 흰색 군복을 입는다.
학벌이 좋으면 빨리 제대하여 사회에 나가 봉사하라고 복무 기간도 짧았다.
그러므로 무식한 사람이 많은 이집트군은 소련제 현대장비를 다루는데 미숙하여 우수한 장비와 많은
전력을 가지고도 전쟁에 패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은 1탄이나 2탄이며 명중하는데, 이집트군은 명중률은 무시하여도 될 정도이었으니 어떻게
맞서서 포격전을 벌릴 수가 있겠는가?
숨어서 기습 공격하려고 하여도 수색대의 꼬마 탱크에 발각되어 이스라엘 공군기에 전멸하는 사태를
면치 못하였다.
결론은 전쟁은 상대적이라고 하며, 이집트의 군이 약하기보다는 이스라엘 군이 너무 강하여 전의를
상실한데에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