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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 안의 성서 해석 - 가톨릭 해석의 특징

hairyMES 2009. 2. 3. 00:18

[출처: http://bomul.paolo.net/]


교황청 성서위원회

교회 안의 성서 해석

III. 가톨릭 해석의 특징

가톨릭 주석은 어떤 특정한 학문적 방법도 자기 것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가톨릭 주석은 성서가 인간 저자들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성서 본문의 한 측면으로 인정한다. 인간 저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표현 능력과 방법을 사용하여 동시대와 그 사회의 상황을 반영하는 성서의 본문을 기록하였다. 따라서 가톨릭 주석은 본문의 의미를 그 언어.문학.사회-문화.종교.역사의 맥락 안에서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여러 가지 학문 방법과 접근을 자유롭게 이용한다. 동시에 가톨릭 주석은 본문에 이용된 사료를 연구하고 각 저자의 개성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본문을 더 잘 설명하고자 한다([성령의 영감], 33항 참조). 가톨릭 주석은 새로운 방법들의 개발과 탐구의 진전에 적극 기여한다.

가톨릭 주석의 특징은 그 자체가 교회의 살아있는 전통 안에 의식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인데, 교회 전통의 첫째 관심사는 성서가 증언하는 계시에 충실하게 머무는 것이다. 현대 해석학은,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이러저러한 형태의 "선이해"에서 출발하지 않고는 본문을 해석하는 일이 불가능함을 분명히 입증하였다. 가톨릭주석은 선이해를 가지고 성서 본문에 접근하는데, 이때 선이해는 현대의 과학 문화와, 이스라엘과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유래한 종교 전통을 밀접하게 결합시킨다. 가톨릭 해석은 성서 자체 안에서 발견되는 역동적 해석 양식과 지속성을 견지하며 교회의 삶 안에서 계속 이어진다. 이 역동적 해석 양식은 해석가와 대상 사이의 살아 있는 친화력의 요구에 부응한다. 사실 이 친화력이야말로 주석 작업 전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모든 선이해에는 위험이 따른다. 가톨릭 주석의 경우에 이 위험은, 성서 본문 그 자체에는 없지만 후대의 전통 안에서 발전한 의미를 그 본문에 부여하려 할 때 생긴다. 주석가는 이런 위험을 조심해야 한다.

가. 성서 전통 안의 해석 차례로

성서 본문은 그것이 탄생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종교 전통의 표현이다. 성서 본문들이 종교 전통들과 맺는 관계양식은 다양한 수준을 보이는 저자들의 창의성에 따라 저마다 달리 나타난다. 세월이 흐르면서 수많은 전통들이 차츰 한데 모여 하나의 거대한 공통 전승을 형성하였다. 성서는 이런 과정의 탁월한 표현이다. 성서는 이 과정에 이바지하였고 계속 이 과정의 규범이 되어왔다.

"성서 전통 안의 해석"은 매우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 표현을 두고 우리는, 성서가 인간의 근본 체험이나 이스라엘 역사의 특정 사건들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아니면 성서 본문들이 문헌이든 구전이든 자체의 사료를 재해석의 과정을 통하여 이용하는 방식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이 경우 성서 본문이 이용한 사료들 가운데 어떤 것은 다른 종교나 문화에서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는 성서 해석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지나치게 광범위한 문제들을 취급할 생각은 없고 다만 성서 자체 안에 등장하는 성서 본문의 해석에 대해서만 몇 가지 견해를 밝히고 싶을 따름이다.

1. 재해석 차례로

성서에 고유한 내적 일체성을 부여하는 요인 하나는 나중에 나온 성서 기록이 흔히 먼저 나온 기록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나온 기록들은 옛 기록들을 암시하면서 의미의 새로운 면, 때때로 원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발전시키는 "재해석"을 시도한다. 또 어떤 본문은 그보다 더 오래된 대목을 명백하게 언급하는데, 이런 경우 그 목적은 그 대목의 의미를 심화하거나 그 대목이 성취되었음을 알리려는데 있다.

하느님께서 그 후손을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창세 15,7.18) 땅의 상속은 하느님의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출애 15,17),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을 위해 마련된(시편 95.8-11; 히브 3,7-4,11) 하느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시편 132,7-8), 마침내 하늘 지성소(히브 6,12.18-20)와 "영원한 상속"(히브 9,15)에 들어가는 것이다.

왕조 계승을 뜻하는 "영원히 안전한 가문"(2사무 7,12-16)을 다윗에게 약속한 나단의 예언은 여러 대목에서(2사무 23,5; 1열왕 2,4; 3,6; 1역대 17,11-14), 특별히 고난의 때를 언급하는 대목에서(시편 89,20-38) 재등장하고, 다른 신탁들에 이어진다(시편 2,7-8; 110,1.4; 아모 9,11; 이사 7,13-14; 예레 23,5-6 등). 그 가운데 어떤 신탁들은 다윗 자신의 왕국이 다시 일어나리라고 선언한다(호세 3,5; 예레 30,9; 에제 34,24; 37,24-25; 마르 11,10 참조). 그 왕국은 인류의 소명을 충만하게 실현시킨다(창세 1,28; 시편 8,6-9; 지혜9,2-3; 10,2).

예루살렘과 유다가 겪게 될 70년 동안의 징벌에 관한 예레미야의 예언은(예레 25,11-12; 29,10) 이 징벌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증언하는 역대기 하권 25장 20절부터 23절에서 회상된다. 그럼에도 훨씬 나중에 다니엘서의 저자는 이 예언을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 이 하느님 말씀이 자신의 시대 상황에 빛을 던져줄 수 있는 심오한 뜻을 이제껏 감추고 있다고 확신한다(다니 9,24-27).

착한 이들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이들에게는 벌을 내리신다는, 하느님의 인과응보적 정의에 대한 근본적 확언은(시편 1,1-6; 112,1-10; 레위 26,3-33 등) 그것이 들어맞지 않는다는 인간의 직접 체험과 충돌을 빚게 된다. 그때 성서는 항의와 불평의 강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허용하고(시편 44; 욥 10,1-7; 13,3-28; 23-24) 점차 그 신비를 심화시킨다(시편 37; 욥 38-42; 이사 53; 지혜 3-5).

2.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관계 차례로

구약성서에 대한 수많은 암시와 명백한 인용을 가득 담은 신약성서의 저술들 안에서 우리는 두 성서 본문 사이의 관계가 무척 가깝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에 신적 계시의 가치를 부여하였다. 그들은 이 계시가 영원한 생명의 원천인 예수의 삶과 가르침 안에서, 무엇보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선언하였다. "성서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에 따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사람들에 나타나셨다"(1고린 15,3-5). 이것이야말로 사도적 가르침의 중심이며 핵심이다(1고린 15,11).

언제나 그렇듯이 성서와 성서를 성취하는 사건들의 관계는 단순히 외형적인 상응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이 관계는 상호 조명의 관계요 변증법적 발전의 관계이다. 분명한 것은 성서가 사건의 의미를 밝혀주고 사건은 성서의 의미를 밝혀준다는 사실이다. 곧 이 둘은 일반적으로 인정된 해석의 어떤 측면들을 단념하고 새로운 해석을 채택하기를 요구한다.

예수께서는 공생활 시초부터 당대에 일반적으로 인정된 해석, 곧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해석(마태 5,20)과는 전혀 다른 독창적이고 참신한 입장을 취하셨다. 수많은 예가 이 사실을 입증한다. 산상설교의 반명제들(마태 5,21-48), 안식일 규정 준수에 대한 그분의 주권적 자유(마르 2,27-28과 병행구들), 정결 예식의 규범들을 상대화시키시는 그분의 태도(마르7,1-23과 병행구들), 그에 반해 다른 영역에서 하신 그분의 철저한 요구(마태 10,2-12와 병행구들; 10,17-27과 병행구들), 무엇보다 "세리와 죄인들"을 환영하시는 그분의 태도(마르 2,15-17과 병행구들)가 그 좋은 예들이다. 이 모든 것은 결코 기존 질서에 도전하기 위한 예수님의 개인적이고 일시적 생각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것은 성서에 표현된 하느님의 뜻을 가장 충실하게 따르려는 태도를 반영한다(마태 5,17; 9,13; 마르 7,8-13과 병행구들; 10,5-9과 병행구들 참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그분께서 시작하신 해석 작업을 극한까지 밀고 갔다. 이로써 어떤 점에서 과거와 완전한 단절이 일어나고 그와 더불어 예기치 못한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었다. "유다인의 왕"(마르 15,26과 그 병행구들), 메시아의 죽음은 군왕 시편과 메시아 예언들에 대한 순전히 현세적인 해석을 완전히 바꾸게 만들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부활과 천상영광은 이 성서 본문들에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의미를 충만하게 부여하였다. 그 결과 전에는 과장되어 보였던 몇몇 표현들이 이제는 자구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표현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준비를 보게 되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말 그대로(사도 2,36; 필립 2,10-11; 히브 1,10-12) 참 "주님"(시편 110,1)이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시편 2,7; 마르 14,62; 로마 1,3-4),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다(시편 45,7; 히브 1,8; 요한 1,1; 20,28).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고"(루가 1,32-33; 1역대 17,11-14; 시편 45,7; 히브 1,8 참조), 동시에 그분께서는 "영원한 사제"(시편 110,4; 히브 5,6-10; 7,23-24)이시다.

파스카 사건에 비추어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구약성서를 새롭게 읽었다.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께서(요한 15,26; 16,7 참조) 그들을 이끄시어 영성적 의미를 발견하도록 해주셨다. 그렇게 하여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의 예언적 가치를 한층 더 강조하게 되었고 동시에 구원 제도로서 지닌 그 가치를 극히 상대화하였다. 이미 복음서들 안에 나오는 이 두 번째 관점은(마태 11,11-13과 그 병행구들; 12,41-42와 병행구들; 요한 4,12-14; 5,37; 6,32 참조.), 특히 바오로의 몇몇 편지와 히브리서에서 강하게 부각된다. 바오로와 히브리서 저자에 따르면, 계시로서 율법 그 자체는 법적 체계라는 그 고유한 목적을 선언할 따름이다9갈라 2,15-5,1; 로마 3,20-21; 6,14; 히브 7,11-19; 10,8-9 참조).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매달리는 이방인들은 이제부터는 그 본질에서 한낱 특정한 백성의 법전 상태로 전락해 버린 성서 율법의 모든 규범들을 지켜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이제 자신들의 삶을 지배하는 파스카 신비의 완전한 차원을 발견하도록 도와줄 영적 양식을 하느님 말씀인 구약성서 안에서 찾아야 한다(루가 24,25-27, 44,45; 로마 1,1-2 참조).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교 성서 안에서 구약과 신약 사이의 관계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약성서 저자들은 특정한 본문들을 이용할 때 자연히 당대에 통용되던 해석의 지식과 절차에 의지한다. 그들에게 현대의 학문적 방법들에 맞추어주기를 요구하는 일은 시대착오적이다. 오히려 주석가는 옛 주석 기법들에 관한 지식을 연마하여 성서 저자가 그 기법들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 주석가는 단순히 한정된 인간 지식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은 이미 구약성서에서 그랬던 것처럼 신약성서에도 서로 다른 견해들이 때때로 서로 긴장관계를 이루면서 함께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신분(요한 8,29; 16,32와 마르 15,34), 또는 모세 율법의 가치(마태 5,17-19; 로마 6,14), 또는 의화를 위한 공로의 필요성(야고 2,24; 로마 3,28; 에페 2,8-9)에 관한 견해들이 그렇다. 성서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체계화 감각의 결여다. 그와는 반대로 성서에는 역동적 긴장이 자주 눈에 띈다. 성서는 같은 사건들을 달리 해석하고 같은 문제에 대해 달리 생각하는 수많은 방식을 저장해 놓은 창고이다. 성서는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지나친 단순화와 편협한 정신을 피하도록 요구한다.

3. 몇 가지 결론 차례로

이상 언급한 내용에서 성서는 해석의 기술과 관련하여 수많은 암시와 제안을 내포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사실 성서 자체가 맨 처음부터 해석 작업이었다. 성서 본문은 옛 계약 공동체와 사도 시대 공동체들이 공동 신앙의 참다운 표현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본문들이 거룩한 책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이 같은 공동체들의 해석 작업에 부합해야 하고 그 작업에 연결되어야 한다(예를 들어 아가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적용되면서 거룩한 책으로 인정을 받았다). 성서의 형성과정에서 각 권의 기록은 대부분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상황에 부응하기 위하여 재편집되고 재해석되었다.

성서에 나오는 본문 해석 방식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제시한다.

성서는 신앙 공동체들이 그 본문들 안에 계시된 신앙의 표현을 공동으로 인정할 때 비로소 탄생하게 된다. 이것은 교회공동체들의 살아있는 신앙을 위하여 성서 해석 자체가 근본 문제들에 대한 동의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모든 이가 인정한 성서 안에서 발견되는 신앙의 표현은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되어야 했기 때문에- 바로 이 사실이 수많은 성서 본문의 "재해석"을 설명해 준다.-성서 해석 역시 창조적 측면을 내포해야 하며, 또한 새로운 질문들을 맞아 성서에서 이끌어낸 답으로 거기에 응답해야 한다.

다양한 성서 본문들 사이에는 이따금 갈등이 발생하기 때문에 성서 해석은 필연적으로 다원적일 수밖에 없다. 단 한 가지 해석이 수많은 소리들의 교향악인 성서 전체의 의미를 다 규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의 특정한 본문 해석이 다른 해석들을 희생시키면서 주도권을 행사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성서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 안에 자리잡고 있다. 성서는 그들의 신앙 전통에서 나왔다. 성서 본문들은 이 전통에 대한 관계 안에서 발전되어 나왔고 다른 한편으로 이 전통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결과적으로 성서 해석은 교회의 품안에서, 그 다원성과 일치 안에서, 그리고 그 신앙의 전통 안에서 이루어진다.

신앙 전통은 성서 저자들의 문학 활동을 위한 삶의 배경을 형성하였다. 성서 저자들은 신앙 전통들을 이 배경 안에 끌어들이면서 공동체의 전례생활과 외적인 삶, 자신들의 지성 세계,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세상의 문화와 역사의 부침도 중요한 몫으로 포함시켰다. 마찬가지로 성서 해석 역시 주석가들에게 자기네 시대의 신앙 공동체가 지니는 삶과 신앙에 온전히 동참하기를 요구한다.

성서 전체와 나누는 대화는 예전에 통용되던 신앙의 이해와 나누는 대화를 의미하고 이 대화는 다시 우리 세대와의 대화에 호흡을 맞추어야 한다. 이 같은 대화는 연속성의 관계를 수립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차이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 해석은 확인하는 작업인 동시에 선별하는 작업이다. 성서 해석은 옛 주석 전통들의 수많은 요소들을 보존하고 자기 것으로 삼는 과정을 통하여 그것들과 연속성을 견지하는 한편, 다른 문제들에서는 더욱 전향적인 발전을 추구하면서 나름대로 독자적인 길을 찾아 나서게 될 것이다.

나. 교회 전통 안의 해석 차례로

하느님 백성인 교회는 성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에 성령의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현실의 온전한 의미를 모든 면에서 즉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굳은 믿음의 공동체 생활을 통해 자신들이 받은 계시의 의미를 더욱 깊고 분명하게 체험하게 되었다. 이 체험을 통하여 그들은 "진리의 성령"의 영향력과 활동을 인정하게 되었는데, 이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진리의 충만함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이었다(요한 16,12-13). 마찬가지로 오늘의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약속에 힘입어 그 순례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위로자,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바를 너희가 모두 깨닫게 해주실 것이다"(요한 14,26).

1. 정경의 형성 차례로

성령의 인도와 이어받은 살아있는 전통의 빛으로 교회는 기록전승들 가운데 어느 것을 성서로 간주해야 하는지를 판별하였다. 성서라 함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하느님을 저자로 삼으며 교회에 전수되어 온"(계시헌장, 11항) 글로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성경에 기록되기를 원하셨던 진리를"(같은 곳) 포함하는 책을 말한다.

성서 "정경"의 판별은 오랜 과정의 소산이었다. 예언자 집단이나 사제 계급 같은 특정한 그룹들에서 백성 전체에 이르기까지 옛 계약 공동체들은 몇몇 본문들 안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일깨우고 나날의 삶을 인도할 힘이 되어줄 하느님 말씀을 알아보게 되었다. 그들은 이 본문들을 보존하고, 전해 주어야 할 유산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이 본문들은 단순히 특정한 저자에게서 나온 영감의 표현으로 간주되지 않고, 하느님 백성의 공동 재산이 되었다. 신약성서는 유다 백성이 전해 준 귀중한 유산인 이 거룩한 본문들을 두고 나름대로 특별한 존경심을 표명한다. 신약성서는 이 본문들을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은"(2디모 3,16; 2베드 1,20-21 참조) "거룩한 책"(로마 1,2)으로, "결코 폐기될 수 없는"(요한 10,35) 문헌으로 여긴다.

"구약성서"를 형성한(2고린 3,14 참조) 이 본문들에 교회는 다른 기록들도 밀접하게 연결시켰다. 첫째, 사도들에게서 유래되고(루가 1,2; 1요한 1,1-3 참조). 성령으로 보장받은(1베드 1,12 참조). "예수께서 처음부터 행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것"(사도 1,1)에 관한 참된 증언이라고 교회가 인정한 기록들과, 둘째, 사도들 자신과 다른 제자들이 믿는 이들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마련한 지침들이 그것이다. 나중에 이 두 가지 기록들은 "신약성서"로 알려지게 되었다.

많은 요소들이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수께서 -그분을 따라 사도들도-구약성서를 영감받은 책으로 인정하신 사실, 그리고 파스카 신비가 그 책의 참다운 완성이라는 확신, 신약성서의 기록이 사도적 가르침의 진정한 반영이라는 확신(그렇다고 사도들 자신들이 그 기록을 작성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 기록이 신앙의 규범에 일치하고 그리스도교 전례 안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의 확인, 마지막으로 이 기록이 공동체들의 회중생활에 부합하고 이 삶을 지탱해 주는 능력에 대한 실제 체험이 신약성서의 형성과정에서 귀중한 몫을 차지하였다.

성서의 정경을 판별하면서 교회도 자신의 정체를 판별하고 정의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서는 교회가 계속 자신의 정체를 재발견할 수 있게 해주고, 세기를 거듭하면서 복음에 항구한 응답을 보내고 복음 전파의 합당한 도구가 되기 위하여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지를 평가할 수 있게 해주는 거울 구실을 한다(계시헌장, 7항 참조). 이 사실은 정경의 기록에 다른 고대 문헌들의 가치와는 전혀 다른, 구원적이고 신학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다른 고대 문헌들도 신앙의 기원과 관련하여 많은 빛을 던져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정경 기록이 지니는 권위를 대신할 수 없다. 그만큼 정경 기록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해를 위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2. 교부들의 주석 차례로

일찍부터 사람들은 신약성서 저자들을 움직여 구원의 메시지를 기록으로 옮기게 하신(계시헌장, 7,18항) 같은 성령께서 교회가 그 영감받은 기록들을 해석할 때도 계속 도와주셨다고 이해하였다(이레네오 [이단 반론], 3,24,1; 3,1,1; 4,33,8; 오리게네스 [원리에 대하여], 2,7,2; 테르툴리아누스, [이단자 규정론], 22 참조).

정경화(政經化) 과정에서 특별한 임무를 맡았던 교부들은 교회의 성서 독서와 성서 해석을 끊임없이 관장하고 인도하는 살아있는 전통과 관련해서도 근본적인 임무를 담당하였다([섭리의 하느님], EB110-111; [성령의 영감], 28-30항; 계시헌장, 23항; 교황청 성서위원회, 복음서의 역사적 진리에 관한 훈령, 1 참조). 위대한 전통의 흐름 속에서 교부 주석이 이룬 공헌은 교회의 교의적 전통을 형성시킨 기본 방향을 성서 전체에서 끌어냈다는 것과, 신자들의 규범과 영적 양식을 위해 풍부한 신학적 가르침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교부들은 성서의 독서와 해석에 높은 가치를 두었다. 이 사실은 무엇보다도 성서 이해와 직접 관련된 강론이나 해설과 같은 그들의 저서에서 엿볼 수 있지만 그들의 논쟁과 신학이 담긴 저서들 안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거기에서 교부들은 자신들의 주요 논제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성서를 끌어들인다.

성서를 읽게 되는 기회는 주로 교회 안에서, 특히 전례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주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교부들이 내놓은 성서 해석은 언제나 신학적이고 사목적이며 대신적(對神的)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공동체와 신자 개개인 모두에게 도움을 준다.

교부들은 성서를 무엇보다 하느님의 책으로, 단일한 저자의 단일한 작품으로 본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인간 저자들을 수동적인 도구로 비하시킨 것은 아니다. 교부들은 성서 각 권의 성격에 따라 고유한 목적을 부여할 줄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의 접근 방법은 계시의 역사적 발전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많은 교부들이 하느님 말씀이신 로고스를 구약성서 저자로 내세우고 결과적으로 성서 전체가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를 비롯한 안티오키아 학파의 몇몇 주석가들을 제외하고, 교부들은 계시된 진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성서의 어떤 구절을 그 문맥에서 자유로이 끌어내었다. 유다인들과 맞서 호교론적 입장에서 또는 다른 신학자들과 신학 논쟁을 벌일 때 그들은 이런 해석에 의존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교부들의 주요 관심사는 형제자매들과 친교를 맺으며 성서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들 사회에서 통용되던 성서 본문을 이용하는 데 만족하였다. 오리게네스가 히브리 성서에 체계적인 흥미를 갖게 된 것은 그가 히브리 성서만을 인정하는 유다인들과 토론을 벌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 진리를 찬양했던 성 예로니모는 다소 예외의 인물이다.

성서의 특정 대목들이 일부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이방인들에게 불러일으킬지도 모를 물의를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교부들은 이 대목들을 해석할 때 자주 우화적 방법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본문의 자구성과 역사성을 포기한 예는 매우 드물다. 또한 교부들의 우화적 해석은 대부분 이방인 작가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우화적 방법의 단순한 적용을 훨씬 뛰어넘는다.

우화에 의지하는 해석은 하느님의 책인 성서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인 교회에 주셨다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원칙적으로 이런 해석에서 시대에 뒤떨어졌거나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제쳐둘 만한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저들 시대에 늘 걸맞는 메시지를 말씀하고 계신다. 교부들은 성서를 해설하면서 예표론적이고 우화적인 해석을 매우 교묘한 방법으로 혼합시키고 함께 엮어놓는다. 그러나 교부들은 기록된 모든 것이 우리를 교육시키기 위해 쓰여졌다고 확신하면서(1고린 10,11 참조) 언제나 사목적이고 교육적인 목적을 위해 이 우화적 방법을 이용하였다.

교부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책을 다루고 있고 따라서 이 책이 완전히 파악하기가 불가능한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우화적 방법으로 본문의 어떤 대목을 해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가 신앙의 유추를 존중하는 조건으로 다른 해석을 자유롭게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부 주석의 특징인 성서의 우화적 해석은 오늘 우리에게 다소 혼란을 가져다 줄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 주석에 담겨진 교회의 체험은 언제나 유효하다([성령의 영감], 31-32항; 계시헌장, 23항 참조). 교부들은 성서를 살아있는 전통 한가운데서 진정한 그리스도교 정신을 가지고 신학적으로 읽도록 가르친다.

3. 성서 해석을 위한 여러 교회 구성원들의 임무 차례로

교회가 전수받은 성서는 믿는 이들 전체의 공동 보화이다. "성전과 성서는 교회에 맡겨진 하느님 말씀의 거룩하고 단일한 보고를 이룬다. 거룩한 백성 전체는 그 사목자들과 일치하여 이 보고에 굳건히 매달린 채 사도들의 가르침에 언제나 충실하게 머물러있다"(계시헌장, 10,21항 참조). 사실 교회 역사에서 신자들이 성서 본문과 친숙하게 되는 것은 시대마다 그 정도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성서는 초창기의 수도 운동에서 최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삶에서 쇄신의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앞자리를 차지해 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세례를 받은 모든 이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성찬례를 거행할 때 그리스도의 현존을 그분의 말씀 안에서도 알아보게 된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성서를 교회 안에서 읽을 때 말씀하시는 분은 그분 자신이시기 때문이다"(전례헌장, 7항). 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들은 하느님 백성 전체를 특징짓는 "신앙 감각"을 얻게 된다. …… "진리의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고 길러주시는 이 신앙 감각으로 하느님 백성은 자신들이 충실하게 따르는 거룩한 교도권의 인도를 받아 인간적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 자체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1데살 2,13 참조). 하느님 백성은 만민을 위하여 성도들에게 한 번 전달된 신앙을(유다 3 참조) 오류없이 확고하게 간직하고 그 신앙을 그리스도교 생활에 더욱 철저하게 적용시킨다"(교회헌장, 12항).

그리하여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성서 해석에 일익을 담당한다.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은 자신들의 사목직무 수행에서 살아있는 전통의 첫 번째 증인들이고 후견인들이다. 각 시대마다 이 살아있는 전통 안에서 성서가 해석된다. "주교들은 진리의 성령으로 비추심을 받아 하느님 말씀을 충실하게 보호하고 설명하며 자신들의 설교를 통하여 그 말씀을 더욱 넓게 알릴 책임을 맡는다"(계시헌장, 9항; 교회헌장, 25항 참조). 주교들의 동업자로서 사제들은 말씀의 선포를 자신들의 주된 의무로 떠맡는다(사제직무교령, 4항). 그들은 자기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전달하면서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일상생활의 구체적인 환경에 적응시킬 때 성서 해석을 위한 특별한 은사를 받는다(같은 곳). 성사를 집전할 때 교회의 직무 안에서 말씀과 성사가 이루는 일치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일은 사제들과 부제들에게 속한 임무이다.

성찬 공동체의 주도자요 신앙의 교육자로서 말씀의 봉사자들은 가르침을 베푸는 일뿐 아니라, 신자들이 성서를 듣고 묵상할 때 하느님 말씀이 그들 마음 안에 무엇을 일러주는지 판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도 자신들의 주요 임무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예를 따라 하느님의 백성인(출애 19,5-6) 지역교회 전체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심을 알아차리는(요한 6,45 참조) 공동체, 믿음과 사랑과 순종으로 그 말씀을 열심히 듣는(신명 6,4-6) 공동체가 된다. 이처럼 진실하게 말씀에 순종하는 공동체들은 늘 믿음과 사랑 안에서 교회 전체와 일치를 이루면서 그들 자신의 상황 안에서 복음화와 대화의 강력한 중심이 되고 사회 개혁의 주체가 된다([현대의 복음선교], 57-58항; 신앙교리성,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자유의 자각], 69-70항).

성령께서는 또한 분명히 그리스도인에게 개별적으로 주어지신다. 성령을 받은 그들이 자신들의 삶 한복판에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자세로 성서를 공부할 때 그들의 마음은 "안에서부터 뜨겁게 타오를"(루가 24,32 참조)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온갖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성서에 접근할 것을 요구하였다(계시헌장, 22.25항). 주지해야 할 사항은 성서 독서가 결코 완전히 사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이는 언제나 교회의 신앙 안에서 성서를 읽고 해석하며, 공동 신앙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성서 독서의 결실을 공동체에 다시 가져오기 때문이다.

성서 전통 전체, 특히 복음서들 안에 담긴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이 "낮은 자리 민중"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하느님 말씀의 특전 받은 청중들로 소개한다. 예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과 배운 자들에게는 숨겨진 것들이 단순한 자들에게는 드러나고(마태 11,25; 루가 10,21), 하느님 나라는 스스로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들의 차지라는(마르 10,14와 병행구들) 사실을 깨달으셨다.

비슷한 취지에서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가 6,20; 마태 5,3 참조) 하고 선포하셨다. 메시아 시대를 알리는 표지들 가운데 하나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루가 4,18; 7,22; 마태 11,5; 신앙교리성, [자유의 자각], 47-48항 참조), 힘없고 인간적 재원이 부족한 사람들은 스스로 어쩔 수 없이 하느님과 그분의 정의에 희망을 둘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이런 이들이야말로 하느님 말씀을 듣고 이해할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교회가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할 이 하느님 말씀은 사회 차원에서도 응답을 요청한다.

교회는 가르치는 은사를 비롯하여 성령께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맡겨주시는 여러 가지 은사와 직무들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1고린 12,28-30; 로마 12,6-7; 에페 4,11-16), 성서 해석에 필요한 전문 지식을 통하여 소유자들을 합당하게 평가한다([성령의 영감]. 46-48항; 계시헌장, 23항; 교황청 성서위원회, 복음서의 역사적 진리에 관한 훈령, 서문). 과거에 주석가들의 노고는 오늘날과 같은 격려를 언제나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지식을 교회에 대한 봉사로 내놓는 주석가들은 자신들이 오리게네스와 예로니모와 함께 하는 초창기부터 라르강쥬 신부와 함께 하는 현대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풍요로운 전통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특히 오늘날 매우 중요한 과제로 등장한 성서의 자구적 의미에 대한 연구는 고대 언어, 역사와 문화, 본문비평 분야에서, 그리고 문학양식의 분석에서 전문 지식을 갖춘 사람들과 이런 학문적 비평 방법들을 올바로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의 공동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 본래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 성서 본문을 주목하는 작업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교회는 성서에 영감을 불어넣으셨던 같은 성령에게서 활력을 얻는 주석가들에게 의존한다. 그것은 "하느님 백성에게 성서의 양식을 효과적으로 나누어 줄 능력이 있는 하느님 말씀의 봉사자들의 숫자가 대단히 많다는 사실을"([성령의 영감] 24. 53-55항; 계시헌장, 23항; 바오로 6세, Sedula Cura〔1971〕: EB 722)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여성 주석가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그들은 성서 해석에 자주 새롭고 투명한 통찰력을 제공하고, 잊혀진 측면들을 재발견한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성서는 교회 전체의 책이고, 모든 사목자들과 신자들이 "간직하고 고백하며 공동 노력을 통하여 실천에 옮겨야 하는 신앙의 유산"에 속한다. 그러나 "성서와 전통에 의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해석할 책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신의 권위를 행사하는 교회의 생활한 교도권에만 위임되었다는 사실은 진리로 남아있다"(게시헌장, 10항). 그러므로 성서 해석의 정통성을 보장해 줄 책임을 맡은 것은 결국 교도권이며, 교도권은 때로 어떤 특정한 해석이 참 복음과 어긋날 때 이를 지적해야 한다. 교도권은 교회에 봉사하기 위하여 교회의 신앙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가운데 신비체의 친교 안에서 위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교도권은 신학자들과 주석가들과 다른 전문인들의 자문을 구한다. 교도권은 이들의 합법적 자유를 인정하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진리 안에서 하느님 백성을 간수한다."는 공동 목표 아래 이들과 상호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일치를 이룬다(신앙교리성, 신학자의 교회 내 소명에 관한 훈령, 21항).

다. 주석가들의 임무 차례로

가톨릭 주석가들의 임무는 많은 면을 포함한다. 그들의 임무는 교회적 임무이다. 왜냐하면 이 임무가 모든 성서 연구와 해설의 풍요로운 결과를 사목자들과 신자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임무는 학문 작업에 속하는 것으로서 가톨릭 주석가가 비가톨릭 동료들과 다른 여러 학문 탐구 분야와 접촉을 갖게 한다. 나아가 이 임무는 탐구와 가르침을 동시에 수반한다. 일반적으로 이 두 활동은 출판으로 이어진다.

1. 주요 지침들 차례로

가톨릭 주석가들은 자신들의 임무에 헌신하면서 성서 계시의 역사적 특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신·구약 성서 둘 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과 당신의 구원 계획에 관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알려주신 역사적 계시를 당대의 흔적이 찍힌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석가들은 역사비평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방법에만 유일한 정당성을 부여해서는 안된다. 본문의 해석에 적합한 모든 방법이 성서 주석에 이바지할 권리가 있다.

가톨릭 주석가들은 해석 작업을 수행하면서 자신들이 하느님 말씀을 해석하고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의 공동 임무는 그들이 사료를 판별하고 양식을 정의하거나 편찬 과정을 설명했다고 해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성서 본문의 의미를 오늘을 위한 하느님 말씀으로 설명했을 때 비로소 자신들이 맡은 과업의 참다운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이 목적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들은 다양한 해석학적 전망들을 참작해야 한다. 해석학적 전망은 성서 메시지의 현대적 의미를 파악하도록 도와주고 오늘날 성서를 읽는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해준다.

주석가들은 성서 본문들의 그리스도론적, 정통적, 교회적 의미들도 설명하여야 한다.

성서 본문의 그리스도론적 의미가 언제나 자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능한 한 그 의미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피로써 새로운 계약을 세우셨을지라도 첫 계약의 책들이 효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이 책들은 복음선포 안으로 수용되면서 "그리스도의 신비"(에페 3,4) 안에서 그 온전한 의미를 얻게 되고 펼치게 된다. 그것들은 이 신비의 수많은 측면들에 빛을 던져주는 한편, 반대로 이 신비로 비춤을 받는다. 이 기록들은 실제로 그분의 내림에 앞서 하느님 백성을 준비시켰다(계시헌장, 14-16항 참조).

성서 각 권이 자체의 고유한 집필 의도로 쓰여졌고 나름대로 특정한 의미를 지닌다 할지라도 전체 정경의 한 부분이 될 때에는 더 깊은 의미를 갖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주석가들의 임무는 아우구스티노의 말에 담긴 진실을 구현시키는 일도 포함한다. "신약성서는 구약 안에 숨어있고, 구약은 신약 안에서 분명해진다"(아우구스티노, [구약 칠경 발췌 주해] 2,73; CSEL 28,Ⅲ,3, 141면 참조).

주석가들은 성서와 교회 사이에 맺어진 관계를 설명해야 한다. 성서는 신앙 공동체들 안에서 생겨났다. 성서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나타내고 초대교회 공동체의 신앙을 표현한다. 성서는 자신보다 앞서 생겨났고 자신을 동반하며 길러준(계시헌장, 21항 참조) 살아있는 전통과 일치를 이루면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인 교회의 건립과 성장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사용하시는 특권적 도구이다. 이러한 교회적 차원은 필연적으로 교회일치운동을 공개적으로 포용한다.

나아가 성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구원을 언급하기 때문에, 주석가의 임무는 필연적으로 보편적 차원을 포함한다. 이 차원은 다른 종교들과 현대 세계의 희망과 불안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2. 탐구 차례로

주석 작업은 학자들의 개별적 작업만으로 추진하기에는 너무 광범위하다. 이 일은 분담해서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필요한 탐구 작업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관련 학문 사이의 상호 협력은 전문화 때문에 생길 수 있는 한계를 극복하도록 도와준다.

충분한 숫자의 잘 준비된 사람들이 갖가지 주석 연구 분야에서 탐구에 투신하는 일은 교회 전체의 선익을 위하여, 동시에 현대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매우 중요하다. 주교들과 수도회 장상들은 한층 시급한 사목적 요구들에 마음을 빼앗겨, 흔히 자신들에게 맡겨진 이 근본적인 요구에 부응해야 할 책임을 충분히 심각하게 여기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 분야를 소홀히 취급하면 교회는 심각한 손해를 입게 된다. 사목자들과 신자들은 교회와도 동떨어지고 신앙생활과도 단절된 주석학의 처분만을 기다릴 위험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성서 연구는 마치 신학의 영혼과 같아야 한다."(계시헌장, 24항)고 주장하면서 주석 탐구의 결정적 중요성을 지적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공의회는 가톨릭 주석가들에게도 그들의 탐구가 신학과 본질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함을 간접적으로 상기시켰다.

3. 가르침 차례로

공의회의 선언은 신학부와 신학교, 그리고 수도회 신학원 안에서 성서 주석을 가르치는 근본 임무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한다. 물론 이런 연구들의 수준은 모든 경우에 똑같을 수는 없다. 주석을 가르치는 일은 남자와 여자가 다 같이 담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학교의 신학부에서는 이 주석 강의가 더 전문적이겠지만 신학교에서는 직접적으로 더 사목적인 방향을 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도 참신하고 진지한 지성적 차원을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된다. 그렇지 못한 방향으로 나가는 가르침은 하느님의 말씀에 불경을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주석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성서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전해 주어야 한다. 교수들은 성서가 얼마나 신중하고 객관적인 연구를 필요로 하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연구는 성서의 문학·역사·사회·신학적 가치를 더욱 잘 평가하게 해줄 것이다. 교수들은 수동적으로 얻어들은 지식만을 엮어서 전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주석 방법의 기본 원리를 하나하나 소개하고 설명해 줌으로써 학생들 자신이 개인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두 가지 형태의 교수법을 번갈아 가며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나는 학생들이 성서 전체에 대한 연구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구약과 신약의 중요한 분야는 어느것 하나 생략하지 말고 종합적인 윤곽을 보여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한 본문을 엄선하여 깊이있게 분석함으로써 성서 주석의 구체적 실례를 소개하는 효과도 얻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한쪽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가 요청된다. 곧, 역사비평 바탕이 결여된 영성적 주석에 한정되거나, 교의적 또는 영성적 내용이 결여된 역사비평 주석에 한정되어서는 안된다([성령의 영감], 24-25항; 교황청 성서위원회, [성서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 EB 598 참조). 가르침은 성서 기록의 역사적 뿌리를 보여주어야 함과 동시에, 그 기록들이 어떻게 당신 자녀들에게 사랑으로 말씀하시는 천상 아버지의 인격적 말씀을 이루는지(계시헌장, 21항 참조)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사목직 안에서 성서의 기록이 필요불가결한 임무를 띠게 된다는(2디모 3,16 참조) 사실도 보여주어야 한다.

4. 출판 차례로

탐구의 결실이자 가르침의 보충인 출판은 주석 작업의 발전과 전파에 매우 중대한 구실을 한다. 오늘날 출판은 인쇄물 이외에도(라디오, 텔레비전, 다른 전자 매체 등) 더욱 강력하고 더욱 빠른 통신 수단들을 포함한다. 이런 매체들을 사용할 줄 아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탐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고도의 학문적 수준을 갖춘 출판물은 대화와 토론과 협력의 중요한 도구이다. 출판물을 통하여 가톨릭 주석은 다른 주석 연구소들 그리고 일반 학계와 교류할 수 있다.

단기간에,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부터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이르기까지, 성서 모임과 사도직 운동과 수도회에 이르는 다양한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큰 도움을 주는 다른 형태의 출판물들도 있다. 대중화 재능이 있는 주석가들은 지극히 유익하고 효과적인 저작을 내놓는다. 그런 저작은 주석 연구 결과가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가능한 한 광범위하게 전파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하다. 이 분야에서 성서의 메시지를 오늘에 맞는 실제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 필요성이 더 분명해진다. 이런 필요를 충족시키려면 주석가들은 우리 시대의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과 교양있는 사람들의 정당한 요구를 고려해야 한다. 주석가들은 그들을 위하여 성서 안에서 무엇이 특정한 시대에 귀속되는 부수적 세부 사항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 무엇을 신화의 언어로 해석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참으로 역사적이요 영감받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판별한다. 성서의 기록들은 현대어나 20세기의 문체로 작성되지 않았다. 히브리 말, 아람 말, 또는 그리스 말 본문 안에 사용된 표현 형식과 문학 양식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성서에 대한 모든 흥미를 잃어버리거나 성서를 단순히 축자적 또는 환상적으로 해석하려 할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임무 안에서 가톨릭 주석가가 목적으로 하는 바는 하느님 말씀을 위한 봉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주석가의 의도는 성서 본문을 자기 일의 결과로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주석가의 일이란 영감받은 저자들이 사용한 고대 사료들을 재구성하거나, 주석학의 최근 결론들을 오늘에 맞추어 제시하는 일을 포함한다. 주석가의 의도는 성서 본문들 자체에 점점 더 환히 빛을 던져 사람들이 그 본문들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고 역사적으로 더 정확하게, 영적으로 더 깊이있게 이해하도록 도와주려는 것이다.

라. 다른 신학 분야들과 갖는 관계 차례로

성서 주석은 자체로 "지성을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신학 분야를 이루면서 다른 신학 연구 분야들과 긴밀하고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한편으로 조직신학은 주석가들이 성서 본문에 접근할 때 갖는 전제가설에 영향력을 미친다. 다른 한편으로 성서 주석은 다른 신학 분야들에 활용할 수 있는 근본 자료를 제공한다. 따라서 성서 주석과 다른 신학 분야들 사이에는 언제나 서로의 특성을 상호 존중하는 가운데 대화관계가 수립된다.

1. 신학과 성서 본문에 대한 전제가설 차례로

주석가들은 필연적으로 전제가설 또는 선이해를 가지고 성서 기록에 접근한다. 가톨릭 주석가의 경우 그것은 신앙의 확실성, 곧 성서는 하느님께 영감을 받은 본문으로서 신앙을 기르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인도하기 위하여 교회에 맡겨졌다는 사실에 바탕을 둔 전제가설과 관계된다. 이 신앙의 확실성은 주석가에게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반성의 과정을 거쳐 교회 공동체 안에 발전된 상태로만 다가온다. 성서의 영감과 그것이 교회생활에 미치는 작용에 대한 조직신학자들의 반성은 이런 식으로 주석 연구에 방향을 제시한다.

반대로 영감받은 성서 본문에 대한 주석가들의 작업은 조직신학자들에게 귀중한 체험을 제공하는데, 이 체험은 그들이 성서적 영감의 신학과 교회 안의 성서 해석을 더 명백하게 설명하려고 할 때 반드시 참조해야 한다. 성서 주석은 특히 성서적 영감의 역사적 성격을 더욱 생생하고 정확하게 깨닫도록 해준다. 성서 주석은 영감의 과정이 이스라엘과 초대교회의 역사 과정에서 전개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의 중개를 통하여 실현되었기 때문에 역사적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중개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모두 당대의 시대적 조건 안에서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느님 백성의 삶 한가운데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나아가 영감받은 성서와 교회 전통 사이의 긴밀한 관계에 관한 신학의 증언은 주석 연구가 진전되면서 더 분명하게 확인되고, 더 정확하게 드러났다. 이러한 주석 연구의 진전으로, 주석가들은 본문을 형성시킨"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본문 자체에 미친 영향력에 점점 더 큰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2. 주석과 교의신학 차례로

성서는 독립된 신학의 장(場)을 이루는 일 없이 신학 연구의 특권적 기초를 제공한다. 신학자들이 학문적으로 정확하고 치밀하게 성서를 해석하는 데에는 주석가들의 작업이 필요하다. 한편 주석가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성서 연구가 참으로 "신학의 영혼이"(계시헌장, 24항) 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런 목적에 도달하려면 그들은 성서 기록의 종교적 내용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주석가들은 교의신학자들이 두 가지 극단을 피하게 도와줄 수 있다. 그 하나는 교의상의 진리를 그 언어적 표현과 완전히 분리시키려는 이원론이다. 이 이원론에서는 언어적 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혼동하면서 인간적 표현의 우연한 측면들까지도 계시된 진리로 간주하려는 근본주의이다.

이 두 극단을 피하는 데에는 위의 두 가지 요소, 곧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분리시키지 않으면서도 구별하는 것, 그리하여 둘 사이에 계속되는 긴장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느님 말씀은 인간 저자들의 작품 안에서 표현된다. 생각과 말은 하느님과 인간에게 동시에 속한다. 말하자면, 성서 전체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동시에 영감받은 인간 저자에게서 나온다. 그러나 이 말은 하느님께서 메시지의 역사적 조건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성서 메시지는 해석과 현실화에 다 같이 열려있다. 다시 말해 과거의 역사적 조건에서 어느 정도 분리하여 현재의 역사적 조건으로 옮겨 심을 수 있다는 뜻이다. 주석가는 교의신학자들이 교회 발전에 기여하는 다른 "신학의 장들"을 참조하면서 벌이는 이런 작업의 기초를 마련한다.

3. 주석과 윤리신학 차례로

비슷한 의견을 주석과 윤리신학의 관계에 대해서도 내놓을 수 있겠다. 성서는 합당한 행동에 대한 수많은 가르침들, 이를테면 명령과 금령, 법적 규정, 예언적 권고와 고발, 지혜의 조언 등을 구세사의 이야기들과 밀접하게 연결시킨다. 주석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이 풍부한 자료의 의미를 평가함으로써 윤리신학자들에게 작업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런 임무는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성서 본문은 흔히 보편적 윤리 원칙들을 정화예식 규정들이나 구체적인 법령들과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근 것이 한데 뒤섞여 있다. 다른 한편으로 성서는 괄목할 만한 윤리적 발전 과정을 반영하는데, 그 완성을 신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노예제도나 이혼, 또는 전쟁의 대량학살 등 윤리적인 문제에 관하여 그 합법성을 계속 인정받으려고 구약성서에 그런 윤리적 입장이 나온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런 문제를 제대로 보려면 판별 과정을 거쳐야 한다. 판별 과정은 이런 문제들을 오랜 세월에 걸쳐 진전되어 온 윤리의식과 감수성에 비추어 재검토할 것이다. 구약성서의 저술들은 신적 교육이 단번에 없애버릴 수 없었던 "불완전하고 잠정적인" 요소들을 포함한다(계시헌장, 15항). 신약성서 그 자체도 윤리 분야에서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신약성서가 흔히 상징적 역설적으로, 심지어는 도발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약성서에는 그리스도인들과 유다교 율법 사이의 관계가 날카로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윤리신학자들은 주석가들에게 많은 중요한 질문을 던져 주석 탐구를 촉진시킬 권리가 있다. 많은 경우 주석가들은 제기된 문제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을 성서 본문에서 찾을 수 없다고 응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성서의 증언은 문제를 성서 전체의 역동적 틀 안에서 고려하면 건실한 방향을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을 다룰 때 십계명의 윤리원칙들은 근본적이다. 구약성서에는 이미 "하느님의 모상대로"(창세 1,27)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과 완전히 일치하는 원칙과 가치들이 들어있다. 신약성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사랑의 계시를 통하여 이 원칙과 가치들에 가장 완전한 빛을 던져준다.

4. 서로 다른 관점들과 이들의 상호 협조 차례로

국제신학위원회는 1988년 신학 진리의 해석에 관한 문서에서 최근에 성서 주석과 교의신학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나서 동 위원회는 현대의 성서 주석이 조직신학에 기여한 긍정적인 공헌을 언급한다([신학 진리의 해석], 1988, C,Ⅰ, 2). 좀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그 갈등은 자유주의 주석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일반적 의미에서는 가톨릭 성서 주석과 교의신학 사이에 아무런 갈등도 없었고 단지 몇 가지 강도 높은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긴장은 한쪽에서 관점을 달리하는 다른 쪽에 맞서 자신의 주장만을 정당하다고 우기면서 화해할 수 없는 반대 방향으로 건너가 버릴 때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두 분야의 관점은 실제로 다르며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 성서 주석의 주요 임무는 성서 본문의 의미를 그 고유한 배경 안에서, 곧 그 특정한 문학적·역사적 배경과 나아가 더욱 폭 넓은 성서 정경의 맥락 안에서 가능한 한 정확하게 규명하는 것이다. 이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주석가는 본문의 신학적 의미가 발견될 때마다 그 의미를 밝힌다. 그리하여 주석과 그 다음의 신학적 반성 사이에 연속성의 관계가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두 분야의 관점은 같지 않다. 주석가의 작업은 근본적으로 역사적이고 설명적이며, 그 범위를 성서의 해석으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은 본질상 더 사변적이고 더 조직적인 임무를 수행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실제로 성서의 특정 본문들과 측면들에만 흥미를 느낀다. 그러나 다른 한편, 성서 이외에 다른 자료들을 풍부하게 고려하는데, 교부들의 저서, 공의회의 정의, 교도권의 다른 여러 문서들, 전례, 그리고 철학 체계와 현대 세계의 문화적·사회적·정치적 상황까지도 다룬다. 그들의 임무는 단순히 성서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해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해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해는 특히 인간 실존에 대한 본질적 관계 안에서 이 신앙의 모든 측면을 완전하게 반성하는 것을 포함한다.

신학은 그 사변적이고 조직적인 방향 때문에 성서를 교의적 명제들을 검증해 주는 증명록(dicta probantia)의 창고로 간주할 우려가 있다. 최근에 신학자들은 고대 문헌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하여 문학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의 중요성을 더 예민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서 주석가들과 더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일하고자 한다.

성서는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어떤 한 조직신학만으로 완전하게 파악하거나 한정시킬 수 없는 풍요로운 의미를 지닌다. 성서의 주요 기능 가운데 하나는 신학 체계들에 여러 가지 심각한 도전을 제기하고, 체계적인 반성의 노력에서 잊혀지거나 소홀히 하기 쉬운 신적 계시와 인간 현실의 중요한 측면들에 끊임없는 주의를 기울이게 만드는 것이다. 주석 방법론에서 일어난 쇄신은 이런 의식을 일깨우는 데 공헌할 수 있다.

반대로 성서 주석도 신학 탐구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신학 탐구는 성서 주석이 본문에 중요한 질문들을 던지게 함으로써 그 완전한 의미와 풍요로움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성서 비평 연구는 신학 탐구나 영적 체험 또는 교회의 분별에서 스스로를 고립시켜서는 안된다. 성서 주석은 온 세상의 구원을 지향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살아있는 신앙 맥락 안에서 수행될 때 가장 좋은 결과를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