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

지상에서 아내를 사랑하는 것 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없다.

hairyMES 2008. 5. 8. 03:48
※먼저 이 글은 극히 개인적인 정리차원에서 썼음에 다소 엉뚱한 문구가 나올 수 있음을 밝힌다.

얼마 전 서부터 나는 "아직은 결혼 할 생각이 없다." 라고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나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으로 주께서 허락하신다면 내가 존경하고 친애하고 사랑할 자매와 함께 할 가정을 꾸릴것을 원한다.

"지상에서 아내를 사랑하는 것 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없다." 라는 말은 아이제나하의 우르술라 코타 부인이 어린 마르틴 루터에게 했던 말이라고 한다. 루터는 종교개혁 후 몸소 결혼의 정당성을 실천 했었다. 수도원에서 도망한 수녀인 케테와 결혼 했으며 가정안에서 6명의 자녀를 낳고 당시의 모범적인 가정을 보여주었다.

키에르케고르의 파혼 사건은 내게 큰 공감을 주었고 나는 오히려 결혼은 나의 부족함을 딛고 일어서는데에 대한 족쇄와 같은 하나의 부담이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와 반대로 C.S 루이스의 결혼과 오늘 서두에 얘기한 루터의 결혼 등은 나의 결혼관을 바꾸기에 충분한 설득력 있는 사건이며, 성경에 비추어 보아 그들의 행동이 옳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얼마전 공동체에서 이성교제에 대한 특강이 있었고 그 특강을 통한 남성과 여성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이였고 그러한 차이점은 서로 보완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다시 나를 돌아보니 나는 결점과 부족함 투성이인 남자였고 루터의 결혼 또한 그러한 부족함을 아내를 통해서 매꾸어짐을 보게 되었다.

루터의 결혼은 모범적이였지만 그들도 풍파 없이 지낸 것은 아니었으며 그렇게 지낼 수도 없었다고 한다. 왜냐 하면 부부가 제각기 독특한 성품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강인하고 화를 잘 내는 반면에, 케테는 천부적으로 말을 잘 했고, 남편에 대한 상당한 존경심에도 불구하고 결코 모든 일에 기꺼이 순종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와 케테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려 노력했으며 특히 루터의 약점을 가장 성공적으로 보완해 주었고, 루터는 아내에게 많은 은덕을 입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언제나 그 같은 사실을 표현했다고 한다.

언젠가서부터 나는 나의 고집을 남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듯 했다. 나의 독단은 옳았던 부분도 있겠지만 틀렸던 부분들도 많았음을 잘 안다. 그런 행동을 하기 전에 마음을 나누고 한번 더 충고를 들었다면..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독단의 깊이가 회복이 힘들다면 나는 키에르케고르의 삶을 살 것이요. 굳어지기 전에 회복이 된다면 루터나 루이스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여기서 나는 나를 조명해보는 바에 의해 혼자선 바로 설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주께서는 부족함을 보여주셨고 그것은 나의 의와 노력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한쪽을 비워 두셨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신자가 있다면 자신안에 빈자리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혹은 부제중인 자아의 단면이 복음과 상관없이 비워진 채로 남아 있는지 돌아보길 바란다.

좀 더 개인적인 사연을 얘기 하자면 부모님과의 대화에서 독신을 몇년전부터 말씀 드렸고 가정의 상황과 학업과 나의 비전이 그러한 생각을 부추겼다. 물론 이 안에서도 나는 자매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기에 나름 노력도 했는데 100%가 아닌 내안에 갈등은 나를 독신의 노선을 걷는양 내버려 뒀는지 모른다.
또한 나름 자매를 이해한다고는 했지만 역시나.. 나와 다른 모습을 발견하곤 왜 그리 실망을 했는지.. 그 실망은 자신의 욕구에 대한 다른 표현이였고 잘못된 판단이였다. 100% 다른이와 100% 다른이의 만남이 완전 같을 수 없지 않은가? 서로의 독특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이 중요했었다.



자... 여기까지가 서론이다. 핫~! ^^;
위와 같이 결혼의 중요성을 알았고 그것이 내게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간략하게 살펴봤지만 이제는 내게 결혼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풀어봐야 겠다.
결론이 어떻게 날지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그 이유를.......... 풀어보자.


1. 나의 삶의 정당성에 관하여

나의 삶의 정당성에 관하여
나는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뒤 나의 삶은 내것인 동시에 하나님의 목적안에 있음을 고백하게 되었다. 즉 인생을 사는 자는 '나'이지만 주관자는 하나님이라는 말로 풀이한다. 주인과 종의 관계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지만 난 그리 풀고 싶지 않다. 구속적 관계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진리가 사실이면서도 그 안에 묶어두고 싶지 않다. 이러한 이해는 나의 신앙관과 인생관을 설명하며 풀어야 하며 결혼에 직결된다.

인간의 자아중심의 세계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 인생은 자아 중심의 사고였다. '내'가 있기 때문에 세상이 있다고 믿었다. 세상은 내가 없이도 돌아가겠지만 그것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다. 즉 내가 사라지면 나의 세상이 끝남과 동시에 세상이 존재함과 상관 없이 세상은 끝난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로써 삼국지의 '조조'의 말중에 "내가 세상을 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버리게 하지 않겠다." 라는 말이 생각나긴하는데 조조의 이말과는 조금 다른 의미이지만 이러한 생각이 내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세상은 인간의 자아를 중심으로 구성되며 자신이 없는 세상의 무의미함을 주장했었다. 이것은 상당히 강력한 중심사상이였고 이기주의와는 또 다른 세계관이다.
이러한 자아중심의 사람이라면 결혼과 같은 인생에 정상적으로 단 한번의 선택에 의한 결정이라면 심사숙고하겠지만 결국은 나를 향한 선택이 된다. 그 사람을 위함이 아닌 나를 위한.

타인을 중심으로한 세계관
주님의 삶은 타인을 위한 삶이였다. 주님은 신이셨지만 인간이 되셨다. (인간을 입으신게 아니다. 인간이 되셨다.) 그리고 인간으로 사셨고 인간으로 죽으셨으며 부활하셨다. 그분은 자신을 위해서 인간이 되신것이 아니고 죄인들을 위해서 인간이 되셨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역사적 사건이고 이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사랑의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쫒는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람들이다. 나 또한 부족하지만 그리스도를 쫒는 사람이다.
인생은 자신이 사는 것이지만 인생은 나를 위함이 아니기도 하다. 상당히 역설적인 느낌이 드는데 그렇다면 자신을 위한 것은 전혀 이루어 질 수 없는것인가? 라는 의문이 든다. 이부분을 나는 자아를 억누르는 절제로만 해결을 할려 했는데, 절제와 더불어서 타인을 위함을 첨가시키니 문제가 해결 되는 듯 했다.

타인이라는것은 나 외 다른이를 말한다. 이것의 범위는 너무나 광범위 해서 나와 다른이를 넘어서서 지구반대편의 얼굴도 모르는 다른 사람 그리고 시공초월을 통해 사랑하는 주님까지도 타인이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타인을 위해서 존재했다. 그는 세상의 죄인들과 함께 했고 하늘의 아버지를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였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이니 너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의 삶의 정당성과 공존에 관하여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선택했다. 즉 나의 인생은 나를 위한 삶이 아닌 타인을 위한 삶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나의 삶이니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결혼문제가 결부되면서 뭔가 꼬여 버렸다.
결혼을 생각하니 나의 의도와 상관 없이 내가 관리해야 할 몸이 배로 늘어나 버린 느낌이 들었다. 혼자일때의 존재로서의 가벼움이 다른이와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나와 생각을 같이 할 자매가 있을 것인가? 자매들은 현실을 중요시 여긴다는데.. 나 같은 비현실적 사고인 사람과 살 수 있을까? 등등 복잡해 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여전히 자아중심적이다.

과거의 나
타당성을 논하기 전에 과거의 나를 조명해 보려한다. 내가 추구하는 삶은 물질세계는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한다고 선택한 음악이 프로그레시브라는 장르였고(돈이 안되는 음악이다) 돈되는 음악을 잠깐 했지만 적응못하고 쫑나버렸다. 그 뒤 직장생활을 하며 돈 맛을 봤지만 모험적인 호주행을 택하며 탄탄한 미래를 저버렸다.(미친짓이였다.) 지금도 돈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불법이기에(돈은 정직해서는 별 볼일 없다.) 돌아섰을 뿐이다. 현재 돈되는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니, 혹시라도 나와 가정을 꾸릴 자매는 정말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돈과는 상관 없는 인생을 추구하며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돈에 대해서 관대해야 할 것이다.
대신 비전이 있다. 나는 나의 비전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비전은 과거에도 추구했고 지금도, 또 앞으로도 그러한 길을 걸을 것이다. 무엇인지는... 다음기회에... ^^



2. 존재적 접근에서 관계적 접근으로

배우자를 고름에 있어서

그러해서 사실 별 기대없이 잘 살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오히려 짝찾기에 매진하며 시간 허비하며 비전과 멀어질 바에 한 부분을(인생의 반이겠지...) 포기하는 편이 나을꺼 같이 보였기 때문이였다. 경험으로 볼때 나의 부족한 부분은 여자에 약하다는 면이였다. 과거에 여자때문에 인생을 다시 설계할려 한적이 있었다. 그것이 잘 되었다면 상관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이것은 나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다가왔고 이제는 혹시나 여자때문에 일(?)을 그르칠까봐 두려웠다. 나의 삶은 내것이 아닌데 배우자를 잘못 선택해서 원하지 않는 나의 삶을 살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또 주위에 그러해 보이는 단편적인 사건들은 나를 더 움추려들게 했다.

존재적 죄성(존재적 접근에서 관계적 접근으로)
이러한 생각은 내면안에 존재하는 일종의 죄성이였다. 계획을 내가 세우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미리 짐작하며 판단했던 죄. 결국 나를 위하지 않는다는 명목하에 자아중심이 되어버린.. 존재적 죄성이 들어나 버린 것이였다. 이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발견이 되는데 인생을 존재적으로 접근이 아닌, 관계적 접근방식으로 전환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존재적 접근은 1인칭으로 자기중심적 사고이다.)
존재적 접근이란 존재함을 중심으로 풀어간다. 다시 말해 존재적으로는 나를 부정하면 할수록 나를 발견하게 되는 함정적 요소가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자기를 부인하는데 있어서 자신을 부정하다가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랄까? 발견한 것은 인간의 죄성과 자아뿐이다.
관계적 접근이란 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하나님과 관계, 타인과의 관계를 중심에 넣는 작업이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또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에 초점을 마추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적 요소는 서로의 존재의 목적을 보완하고 있다.

관계란
쉽게 풀이하면 이런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있음으로 나와 관계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또한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하시며 나는 그를 위해 무엇을 기꺼이 하겠는가?"
"하나님은 나를 통해 만족하시고 나도 그를 통해 만족한다."
이러한 전제는 존재적인 부분을 모두 수긍하며 관계속에 존재의 본질을 찾는다.
즉 상대는 나에게, 나는 상대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보는 것이다.

결혼을 관계적 접근으로
두 남여가 결혼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마도 두 남여의 관계일 것이다.
존재적 접근은 그 사람이 내게 어떤 존재인가? 로 풀어간다. 내가 사랑할까? 내게 도움 될까? 내가 선택한 것이 옳을까? 등등...
관계적 접근은 그사람을 통해서 내가 만족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사랑이 되어 만족하며, 이 결혼에 하나님이 관여 하셔서 감사하는등의 그녀가 나를 통해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만족하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 기뻐하시는 것을 통해서 나의 존재를 찾는 것으로 접근한다.
이것은 자신의 존재를 없애지 않은채 타인을 위한 삶을 이루는 모습이다.

자기부인을 하지 않은채로 타인을 위한 삶을 살라는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타인을 위한 인생을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하지만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무엇을 위함인가? 나를 위해서인가? 아니다. 자기부인은 나를 위함이 아니다. 그런데 자기부인하는 것을 왜 자신의 관점과 만족을 요구하게 되는 걸까? 역시 이러한 관점은 자기중심적이다. 사고전환이 필요다.
하나님은 우릴 위해 그리스도를 통해 은총을 주셨다. 그 은총은 이땅에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함이고 그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닌 우리를 위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대가를 치르고 주시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우리를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족하시기 위함이다. 이 위대한 사랑의 표현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족하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것을 어떤 차원으로 따라야 한다는 말인가? 맞다.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 위함이다. 즉 타인을 위함인 것이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을 존재적인 자아를 완전히 없애라는 뜻으로 오인하면 안될 듯 하다. 비움은 다시 채움이 있듯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릴 통해 만족하시는 분이신데 우리를 없애면 그는 무엇을 통해 만족을 얻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신다.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을 통해서이다. 즉 자신을 통해서 타인이 만족하길 원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만족만으로 끝내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도 타인을 만족시켜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만족시켜가는 과정가운데 서로 또 만족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관계는 사랑을 전제로 한다.
전에 사랑에 관한 포스트-아래 트랙백-를 한적이 있다. 그때 내가 말했던 내용은 사랑은 나에게서 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었다. 이 의견은 아직 동일하게 이글에서도 적용된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내게 먼저하신 것이다. 내게서 발산되는 사랑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랑에 대한 반응이다. 곧 내게서 시작된것이 없으며 근원은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잠깐 잡설~
여기까지 읽은이가 있다면 정말 고마움을 표한다.. 이제 내가 말하고 싶어 하는 부분에 거의 다 와간다..(뭣이라!! 아직도 알맹이가 안 나온기야?!?!?!? 라고 황당해 할 표정이 훤하다.ㅋㅋㅋㅋ)
상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무슨 결혼을 정당화 시키는데 이리 잡설이 많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인생은 개인적이다. 또 인생은 타인과의 관계적이다. 인생에서의 사건은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른이와 연관되고 그것은 또 그 사람의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 포스트는 극히 개인적이면서 그리스도인과 결부 시키며 더 나아가서 모두의 하나님과도 결부 시키고 있는 것이다.


3. 사랑의 생성

사랑은 어떻게 생성되는가?

이제 상당히 중요한 주제가 나왔다. 결국 지금까지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 떠들어 댄것이다... 미안하다 말이 많아서 -.-;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을지는 우리가 피조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주적으로 보았을때 만약 하나님께서 만드시지 않은 외계인이 등장했다면 하나님은 그 외계인을 통해서 만족하시고 사랑하실까? 외계인이 어떻게 생기고 반응하든 간에 쉽게 마음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
사랑은 때문에 운명적인 결부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기 전에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운명이 따른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지도 않은 피조물을 사랑하실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또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왔더라(창 1:31)는 표현을 빌려,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스러워야 할 것이다. 그뒤에 감정을 보내시고 그 감정에 반응하면 사랑하신다. 즉 순종을 했던 아담을 사랑하셨고 홀로 있는 아담이 보시기에 좋지 않아서 그를 위한 배필을 지으셨다.(창 2:18) 이것도 사랑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사람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운명적 결부(인간으로서, 하나님의 택하심)가 있어야 하고, 보기에 좋아야 하고(외모, 행실 등), 자신의 감정(배려, 관심 등)에 반응해야 기본 적인 사랑의 출발로써의 충족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나와 타인과의 관계적 충족을 전제로 한 것이고 꼭 이런 순서가 정해진것은 아닐것이다.

운명적 결부
생명이 없는 것을 배우자로 맺지는 않을 것이다. 배우자의 개념을 위에서 비쳤지만 서로 부족함을 채워 완성시켜가는 타인중에 가장 가까운 동역자로 봄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때문에 운명적 결부에서 하나님께서 생명이 없는 배우자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생명이 있어야 하며 감정교류를 위해서 같은 종족 즉 인간이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동성의 배우자는 그분들께 미안하지만 성경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택하신 배우자는 이성이다.
더 나아가서 이성중에 누가 하나님께서 짝을 정해 주신것인지는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자.

보기에 좋왔더라
자기눈에 보기 좋은 사람을 배우자로 맺고 싶은 것은 솔직한것이다. 보기 좋다라는것이 세상적인 얼짱몸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제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신에게 맞는 이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외모뿐 아니라 성격과 환경등..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과연 내가 보기 좋은 것이 성경적인지 확인해야 한다. 자신의 욕심으로 사람을 본다면 옳지 않을 것이다.
어느 신혼부부가 자신들의 만난 사연을 얘기하는데 기도응답이라면서 자신들이 기도제목으로 기도했던 것에서 딱 맞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내려놓고 보니 자신의 옆에 있는 이 형제,자매였다는 것을 고백하는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조건에 맞지 않는다면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 조건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했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영원하지 않은 조건을 기도제목으로 삼고 응답으로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영원을 소유한 자들이며 영원을 향한 자들이다. 자신이 보아야 할 부분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언젠가 '얼굴에 관해서' 포스트를 할 기회가 있겠지만 인간은 얼굴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이 보는것의 착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분명 지금 보기에 아름다운 것은 눈깜짝 할 사이에 4-50년이 지난 얼굴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 4-50년이 지난 후는 다시 지금 현재라는 시점에 있을 것이고 4-50년전에 아름다웠던 것이 그대로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의 얼굴이 아름답지 않다고 해서 그사람에 대한 감정도 그것으로 인해서 달라져야 하는가? 그전의 그사람에 대한 부와 명예가 그때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의 존재가 틀려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즉, 보기에 좋은 것은 한시적이지 않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자들의 보는관점은 영원적이여야 한다.
세상적인 것을 모두 포기하고 등한시 하라는 말은 아니다. 단적인 예로 외모를 본다고 할때 자신의 취향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취향대로 받아들이면 되는것이다. 뭐 이런것을 갖고 성경적이니 뭐니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외모를 '성적인'관심으로만 접근한다던가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배우자는 지상에서 가장 사랑할 대상이다. 보기에 좋지 않은 상대를 배우자로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에 반응
위에서 잠깐 얘기했지만 생명이 있는 것과 인간을 사랑할 대상으로 말했으며 배우자도 이러해야 할 것이다. 특히 감정 부분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인데 사랑의 생성의 마지막 단계로 보기 때문이다.
운명적 결부와 보기에 좋음이 충족되어야 감정을 전달이 될 것이다. 감정이라는 것은 쌍방통행이기 때문에 반응이 없는 대상과는 감정교류가 될 수 없다.
좋은 반응은 서로의 호감을 나타냄으로 볼 수 있을것이다. 물론 인간의 다양성때문에 무엇이 좋은 반응인지는 사람마다 틀릴수 있겠지만 감정이 마지막으로 사랑이 생성되는 과정중 하나라는 점은 틀림이 없다.


4. 적용
이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때와는 달리 엉청나게 거대해진 글이 되고 말았다.. 솔직히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지도 모를 정도이다.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긴 했는데. 정리하자면 그리스도를 쫒게된 나의 삶은 개인적인 욕구를 더이상 쫒지 않기로 했지만 혼자 있는것이 개인적인 욕구를 절제한다고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홀로있는 것을 보시기에 좋지 않다고 하셨고, 개인적으로도 부족함이 많기에 주께서 허락하신 배우자를 만나 서로 채워가며 모범적인 가정을 이루는 것이 좋을 듯 하고 그 모범적인 가정의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은 지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임을 정리하는데 있어 적용점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러이러하니 나도 사랑할련다! 가 결론이였다... 결론에 도달하는 길이 이리 멀 줄이야...-.-;

적용을 광범위하게 하지 않고 개인적인 견해로 할까 한다. 이 글이 무슨 논문도 아니고(하지만 논문형식을 항상 연습삼아서 적어 볼려 노력하고 있다.) 공개되긴 하겠지만 개인블로그(글쓰기 연습용이다.)에서뿐이니 개인적인 적용을 하겠다.
음... 사실 다음주까지 해야 할 레포트가 4개이고 주일을 지나면 다음주인데 이렇게 이런것 적을 여유는 없지만 벌써 손댄지가 2주가 다 되어 가니 빨리 끝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시간이 가면서 더 정리가 안되는듯... ㅠ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자
내가 정의하는 사랑은 인간에게서 생성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닌 사랑의 가면을 쓴 다른 감정일 것이다.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위에 정리한대로 변하지 않는 영원히 그대로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에서 시작된다면 그렇게 자신하던 남여간의 사랑도 자신이 그사람의 무엇을 사랑하는지 혼동하게 될 것이다. 지금이라는 시점은 과거도 그랬고 미래에도 같은 시점이다. 지금... 사람으로서 그를 사랑하는데 그 자체로 사랑한다고 했을때 과연 50년 후에도 똑같이 사람을 사랑할까? 물론 순수한 사랑이 있을 수 있음을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순수함은 일종의 과거에대한 회상으로서의 포기일것이다. 그가 변하든 자신이 변하든 변한것을 사랑하는 것이고 과거의  사랑과 지금의 사랑은 다른 사랑일 것이다. 때론 그가 갖고 있는 부와 명예와 육체만을 탐하고 질투와 집착등의 왜곡된 감정으로 돌려주는 그러한 사랑을 하고 있을수도 있다. 우리는 사실 주변에서 이러한 남여를 많이 볼 수 있다.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나눠줄 수 있다. 사랑은 관계적이다. 사랑은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닌 타인을 위한 감정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그 사랑을 나누기 위함이다. 그 나눔은 타인을 향한 것이다. 그 타인에는 주님도 포함된다. 나눔은 받는 것이다. 지상에서의 가장 온전한 사랑이 가능한 상태가 배우자를 사랑할 때이다.
사람을 만날때 주님을 투과해서 보자. 주님의 관점에서 보자는 말이다. 주님의 사랑의 감정으로 보자.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의 사랑이 긍휼로서의 사랑만을 얘기하진 않는다. 이글의 목적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찾고자 함이다. 사랑의 대상은 지상의 것이지만 사랑의 근원은 주님의 것이기에 가능하다.

준비된 자와 준비되지 않은자
주님의 관점에서 볼려 노력하면 사람을 보는 시각이 틀려지는 듯 하다. 하지만 이것도 일종의 함정이 있는데 왠지 자신의 눈높이가 높아지며 상대를 정죄의 눈으로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꼭 자신은 안그런것 처럼.. 이 문제는 자신도 어쩔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며 점차 분별력을 갖아야 할 것이다.
연애를 시작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신앙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많다. 일단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그리스도인은 아니라는것이 보일 것이고 소위 주님의 신부로써 준비된 자와 준비되어 있지 않아보이는자로 어느정도 구분이 될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되인은 준비되어 보이는 자를 선택해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은 성화단계를 거친다. 솔직히 교회를 다니지만 성화가 뭔지도 모르고 죽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신학적으로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난 주님의 섭리를 믿는다. 때문에 구분된자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정죄하진 못한다. 견인은 주께서 하시기 때문이다.
자신의 구분됨이 어느정도인지는 자신도 모를것이다. 하지만 눈까지 먼것은 아니다. 즉 준비된 자는 준비된 자가 보일 것이다.(인식론인가?) 그것은 주님의 신호이며 분별력이 있다면 알 수 있다.
나의 견해로는 자신이 구분해 내지 못한다면 신뢰할 수 있는 분의 조언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이 볼 수 있어야 가장 좋은 것이고 확신 할 수 있을 것이다. 준비된 자가 준비된 신부를 맞이 할 것이다. 기도로 구하라. 주께서 지혜를 허락하실 것이다.

분별력
나도 속은 적이 있다. 주님의 신호일것이라 확신을 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신호였다. 내가 원했던 것이며 내식대로 같다 붙인 것이다. 온전히 기도를 하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애써 또다시 부정한다.
여기서 말하는 분별력은 "그 사람일까요?" 가 아니다. 자신이 온전한지를 분별해야 한다.
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온전한지를 봐야 한다. 그 사람이 예뻐서? 돈이 많아서? 환경이 좋와서? 박식해서? 성격이 좋와서? 이러한 것들은 그를 향한 마음에 결정적인 것이 아니며 목적일 수 없다. 이런 것은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근본적인 마음은 연합이여야 할 것이다. 주님께 기쁨이 되는 연합. 그 사람에게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내가 만족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분별해야 한다.
분별은 자신의 욕구를 위함이 아니다. 준비된 것은 조건만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과의 연합을 위한 분별이며 준비일 뿐이다.

조건
서로에게 자신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은 자신을 내어 놓게 된다. 이 내어 놓음은 자신의 관심에 대한 환원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든다. 처음부터 자기중심이 아닌 타인중심이였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알듯이 온전한 사랑은 조건없는 사랑이다. 돌려 받을 것을 생각하고는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 줄 수 없다. 조금 희망적인 말을 하자면 타인이 만족함으로 자신이 만족할 뿐이다. 하지만 사랑은 쌍방통행임을 기억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놓을때 서로가 서로에게 만족할때.. 그것이 주님이 주신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결혼식에서 선언하는 부분이 가장 인상깊었다. "하나님께서 이 결혼을 허락하시고 그 누구도 둘을 갈라서게 할 수 없다." 는 선언. 이 것은 하나님아래 두 사람이 결합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결혼의 목적이 연합으로 인한 완성을 꿈꾸는것임을 감안했을때 오늘날 집안이 만난다는 결혼문화는 어찌보면 주객이 전도된듯한 느낌이 든다. 집안을 무시하자라는 말이 아니라, 기본적인 접근이 잘못되었다. 교회에 제도가 필요하지만 제도화된 교회는 옳지 않듯이. 무엇이 우선적인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둘이 결합하여 결혼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냥 사랑하기에 결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욕을 참기 힘들어서 하는 것인지 서로 연합하는 이유에 대하여 분별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인 소견으로 결혼은 인생의 완성을 위해서라 생각한다. 타인을 향한 가장 완성된 모습. 그것이 곧 결혼이고 출산을 통한 '나옴'을 경험할 수 있음으로 인생의 또다른 차원이 열림을 기대할 수 있다. 이 모든 경험과 배움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며 타인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가장 모범적인 답안이 되는 듯하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타인을 사랑하기란 무척 어렵다. 타인을 향해 눈물을 흘리는 것과 죽음을 각오하는 것은 내가 타인이 되어야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지상에서 타인과 연합이 가장 가능한 사람은 바로 배우자이다. 배우자를 통해 연합을 배울 것이며, 타인의 일부가 될 것이며, 인생의 반을 되찾을 것이다.
타인은 내가 없어지길 원하지 않는다. 타인도 나의 존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의 주체성은 타인을 향해 있고 타인도 나를 향해 있다.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자신은 타인이 되는 것이다.



결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으셨고 인생을 타인을 위해 존재하셨다. 고로 그리스도인은 타인을 위한 존재이다.
그리스도인으로써 결혼은 타인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사랑을 경험하고 배우는 과정이다. 인간이 그리 고상하지 않고 너도 나도 죄인으로서의 인간임을,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연합으로서의 관계적 존재임을 알게 해 줄 것이다.
루터는 말년에 코타 부인이 말한 "지상에서 아내를 사랑하는 것 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없다." 라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그의 말년에 부인이 함께 함을 항상 감사했음을 알 수 있다.

결혼은 연합이다. 타인과 타인의 연합. 결코 같지 않아 보이는 존재의 연합이기에 신비로운 현상이다. 이 연합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은 주께로부터 나왔으며 인간을 하나로 묶어 주었다. 이것은 주님의 사랑의 반응이며 이 사랑의 반응으로 인해서 주님은 만족하신다. 주님이 만족하심으로 인간도 만족한다.
결혼이라는 연합은 결코 자신을 위함이 아니다. 하지만 나의 축복을 생각하는 타인으로 인해서 연합을 통해 서로가 만족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자신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타인을 만족하게 하기 위함이요. 결혼이라는 연합은 모두를 만족시기며 인생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후기
결론이 옳게 나왔는지 모르겠다.. 지금 너무 졸리고.. 대충 끝내 버린것 같은데 일단 결혼에 대해.. "다른 사람은 다 해도 나는 안해도 상관 없다." 생각했던 것에서 많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왠지 독신이 더 멋져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도 배우자는 중요한 인생의 도약적인 사건일 것이고 배우자를 위한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여실히 들어났다. '지상에서 아내를 사랑하는 것 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없다.' 라는 문구가 너무 맘에 와닿아서 쓰기 시작한것인데...  지상에서의 사랑의 완성. 인생을 경험하러 온 사람들에게는 결코 놓칠 수 없는 관문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런 사랑을 해 보고 싶다.
기회가 되면 '인간의 사랑의 넘어섬' 이나 '인생의 조건에 관하여' 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해봤으면 좋겠다.

'though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잎만 무성했던 무화과 나무  (0) 2008.06.06
변증과 믿음  (0) 2008.05.11
하나님이 시험하신다.  (0) 2008.05.04
무엇이 우선순위이며 목적인가?  (0) 2008.04.12
눈을 의지하는 인간  (0) 2008.04.09